축구에서 '이상'이란 곧 낭만이자 하나의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성공을 위해서는 결국 버려야 하는 족쇄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이상주의자야." 이 문장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그'라는 존재가 어떤 결과를 냈는지에 대한 정보를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저 문장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상을 좇다가 현실과 동떨어진 인간'을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오늘날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상이란 현실에서의 성공과 양립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된다. 어쩌면 축구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상을 버리고 거친 현실에 순응하는 것에 길들여져있다. 이상, 이제는 마치 어린 시절의 꿈처럼 가슴 속에나 묻어두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필드 위에 구현해낸 감독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냉혹한 시험대에 올랐고 자신의 신념이 수많은 반론을 거치며 마침내 깨지고 마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게 순수한 철학 따위는 없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끝까지 걸어간 이들의 서사의 종말은 모두 비극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이상에 눈이 멀었다는 멸시의 손가락질은 그 누구도 피해가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이상주의의 패배를 증명하는 표본으로 남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한 수많은 반론에 정면으로 맞서서 모두 깨부수고 완벽에 가장 가까운 논리를 증명하며 마침내 승리해낸 사람이 있다. "Jogo Bonito(아름답게 플레이하라)"라는 브라질 축구의 정신을 온 세상에 퍼뜨린 텔레 산타나의 이야기이다.
Telê Santana
텔레 산타나
1931.07.26.~2006.04.21.
브라질
주요 경력
1969~1970 플루미넨시
1970~1972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76~1978 그레미우
1980~1982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1985~1986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1990~1996 상파울루
텔레 산타나는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이타비리투 자치시에서 태어났다. 여느 브라질 소년들처럼 산타나 역시 지역 축구팀에서 축구를 시작하였으나 프로 선수 생활은 히우지자네이루의 명문 구단인 플루미넨시에서 보냈다.
플루미넨시에서 1951년부터 1960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라이트윙으로 활약하며 구단의 전설적인 선수로 남게 되었다. 측면 공격수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으로 이동하여 득점하는 것에 능했던 선수로, 557경기에서 165골을 득점했다. 이 때 얻은 별명이 바로 그의 유명한 애칭, "Fio de Esperança(희망의 끈)"이다.
그의 선수 시절은 이 글에서 다루는 범위를 벗어나므로 간략하게만 적도록 하겠다. 산타나는 플루미넨시 이후 과라니, 마두레이라, 바스쿠 다 가마에서 짧게 뛰었다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훌륭했던 선수 경력처럼 그의 감독 경력도 좋게 출발했다. 자신이 선수로 오래 활약하며 애정을 보였던 플루미넨시의 유소년 팀에서 시작하여 성인 팀을 맡았고 1969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히우지자네이루 주립 리그)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플루미넨시에서의 경력은 선수 생활처럼 오래 가지 못하였고, 플루미넨시를 떠나 자신의 고향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명문 구단인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 부임하게 되었다. 이 시대 브라질 감독들은 대체로 한 팀에 오래 머무르는 것보다 여러 팀을 떠도는 경우가 많았기에, 산타나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리그의 정복을 목표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970년대는 기존 브라질 축구를 양분하던 상파울루 주와 히우지자네이루 주의 양강 체제를 깨부수고 여러 지역의 평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대다. 특히 1960년대부터 상승세를 탄 미나스제라이스 주와 히우그란지두술 주의 강호들이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아 브라질 전국 무대에서 높은 경쟁력을 보여주었다. 산타나의 감독 경력도 이들의 상승세와 맞물려 성장하였다.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 부임하자마자 첫 시즌에 캄페오나투 미네이루(미나스제라이스 주립 리그)를 우승하였고, 그 다음 시즌인 1971년에는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브라질 전국 리그)를 우승하며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를 브라질 전국에서 손꼽히는 강자로 이끌었다. 그 후 1973년에 잠시 상파울루에 부임하였으나, 토니뉴 게헤이루 등의 일부 핵심 선수와의 모종의 갈등으로 인해 임기를 오래 이어가지 못했고 그 해 여름에 다시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로 돌아왔다.
그리고 별다른 우승 트로피를 얻지 못한 채 1976년에 보타포구로 떠났고, 거기서도 딱히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으며 한 시즌만에 팀을 떠났다. 새로 둥지를 튼 곳은 바로 히우그란지두술 주의 명문 구단 그레미우였다. 당시 그레미우는 지역 라이벌 인테르나시오나우에게 밀려 주의 2인자로 머물러 있었다. 인테르나시오나우는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용병으로 불리는 엘리아스 피게로아를 앞세워 주립 리그와 전국 리그를 가리지 않고 휩쓸며 강력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고, 이에 그레미우는 지역 챔피언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 절실한 상황이었다.
경력 초반부터 좋은 실적을 냈으나 그 성장세가 잠시 정체된 산타나에게 있어서 그레미우는 자신을 증명하기에 좋은 구단이었다. 1977년에 캄페오나투 가우슈(히우그란지두술 주립 리그)를 우승하며, 인테르나시오나우의 무려 8년 간의 독주를 끝내고 그레미우에 9년 만의 리그 우승을 선물해주었다. 이후 산타나는 1978년을 끝으로 그레미우를 떠났지만, 그레미우는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아 1980년대 초반까지 브라질의 헤게모니를 쥐었다. 산타나가 나름의 초석을 깔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브라질 4대 주립 리그 중 3개의 리그를 우승한 산타나는 4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이미 브라질 최고의 감독 반열로 인정받고 있었다. 가시적인 성과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감독 스타일이 브라질 축구의 색깔과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감독 스타일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선수들을 기용하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조직력을 높여, 경기장에서 화려하고 유기적인 공격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산타나의 이러한 철학은 "Jogo Bonito(아름답게 플레이하라)"라는 브라질 축구의 전통적인 정신과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을 조금씩 잃어가던 시대에 나타난 산타나는 브라질 축구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으로 여겨지며 국민적으로 지지를 받는 감독이 되었다. 그렇게 주가를 계속 높이던 산타나는 1979년에 짧게 파우메이라스를 맡아서 우승컵을 들어올리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마침내 1980년 2월 12일, CBF(브라질 축구 연맹)에 의해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산타나와 셀레상 1
산타나 체제의 셀레상(브라질 국가대표팀)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타나 이전의 셀레상은 어땠는가? 1970년에 3번째 FIFA 월드컵 우승을 달성한 이후, 펠레의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세대 교체를 진행했었다. 펠레와 함께 공격진을 이루었던 토스탕, 히벨리누, 자이르지뉴를 주축으로 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것을 계획했지만, 토스탕이 망막 박리라는 치명적인 안구 질환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악재가 생겼다. 토스탕의 공백은 크나큰 손실이었고, 마리우 자갈루 감독은 1974 FIFA 월드컵에서 실용주의로 노선을 바꾸었다. 브라질은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강력한 수비력을 내세웠고 4위라는 호성적을 냈으나 결과와 과정 모두 브라질 팬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7경기에서 6득점밖에 하지 못한 처참한 공격력도 문제였으나, 네덜란드에게 자신들이 자랑하는 기술적인 축구로 2-0 완패를 당한 것이 큰 수치로 여겨졌다. 1978 FIFA 월드컵에서는 그나마 과정은 회복했으나 3위라는 성적표는 아쉬움을 달래기 어려웠다. 브라질 팬들이 그리워하던 강력함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브라질은 더 이상 세계 축구의 중심에 없었다.
브라질의 정신을 잃고 암흑기의 쓴맛을 본 브라질에게, 그 누구보다 브라질스러운 축구를 하는 산타나는 브라질 축구를 다시 세계 정상으로 이끌어줄 메시아와도 같았을 것이다.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기대와 함께 지휘봉을 잡은 산타나는 정말로 브라질을 다시 강력한 팀으로 바꾸었다. 산타나는 지쿠를 필두로 한 파우캉, 소크라치스, 토니뉴 세레주 등의 황금 세대를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세대 교체를 완벽하게 이루어냈다.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4-2-2-2 포메이션을 기본 틀로 삼아 개인기가 뛰어난 선수들이 마음껏 연계하며 팀 플레이 안에서 자신의 기술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2명의 공격형 미드필더, 지쿠와 소크라치스는 사실상 프리롤에 가까운 자유도를 부여받았고, 중앙과 측면을 자유롭게 오가며 화려한 기술로 상대 수비진을 유린했다. 그리고 나름의 조직적인 움직임을 주문하기도 했는데, 투톱 중 한 자리에 본래 레프트윙인 에데르를 기용하였고 에데르가 중앙에서 좌측면으로 이동할 때 지쿠가 중앙에 자리잡고 소크라치스가 우측면으로 이동하며 4-2-3-1 형태를 형성하도록 했다.
전문 라이트윙이 없다는 사실은 브라질 내에서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산타나는 자신의 전술에 맞춰서 선수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선수를 기용하기 위해 맞춤 전술을 짜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지쿠와 소크라치스를 기용하고 그들을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짠 것이다. 이에 관해 산타나가 한 어록이 있다.
"나에게 가린샤와 같은 훌륭한 윙어가 있었다면 그가 뛰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최고의 선수들은 항상 나와 함께 플레이합니다."
물론 그 비판들은 산타나의 팀이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자 사그라들었다.
양쪽 풀백 주니오르와 레안드루는 사이드라인을 따라 직선적으로 오버래핑하는 대신 마치 컷인 플레이를 하는 윙어처럼 하프스페이스 공략에 참여하며 어느 정도 인버티드 풀백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다. 두 명의 센터백은 오스카르 베르나르지와 루이지뉴를 기용하였고 직접적인 전진을 삼가는 대신 최후방 라인 형성과 후방 빌드업에 집중하도록 했다. 3선에는 파우캉과 토니뉴 세레주만 존재하였지만 이 2명의 중원 장악력이 엄청났기에 2명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월드컵 준비 기간 동안의 핵심이 바로 최전방 공격수인데, 확고한 주전을 두지 않고 여러 명의 선수를 돌아가면서 기용하며 주전 경쟁을 시켰다. 세르지뉴 슐라파, 헤이나우두, 호베르투 지나미치, 바우타자르 등 여러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들이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최종적으로 셀레상과 상파울루에서 모두 절정의 폼을 보여주던 세르지뉴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선택되었다.
새롭게 바뀐 브라질은 무시무시한 강팀으로 거듭났다. 브라질 축구의 정신에 부합하는 아름다운 플레이는 보는 눈을 즐겁게 했고 경기를 지배하며 많은 득점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많은 경기를 이겼고 대승도 여러 번 거두었다.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상대를 완전히 쳐부수는 강력함이 있었다. 누가 뭐래도 브라질은 다시 세계 제일의 팀이었다. 모두가 브라질을 찬양했고 1982 FIFA 월드컵의 우승 후보로 브라질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산타나가 부임한 이후, 월드컵 이전까지 브라질은 33경기에서 25승 6무 2패, 86득점 20실점이라는 충격적인 전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훌륭한 경기력에서 나오는 통계 그 이상의 포스는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브라질 축구의 부활은 국가대표팀만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1981년 플라멩구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탈 컵을 연달아 제패하며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특히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는 유럽 챔피언 리버풀을 무려 3-0으로 박살내는 위엄을 보여줬다. 플라멩구는 당시 최강의 팀이었고 이를 이끈 에이스 지쿠는 마라도나에 필적하는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또한 플라멩구와 견줄 만한 전력을 갖춘 팀이 브라질 전국에 몇 팀이 더 있었을 정도로, 브라질의 리그 시스템과 선수 풀은 전성기 시절처럼 탄탄했다. 인재들이 쏟아져나오는 브라질 축구계답게 클럽 축구에서도 좋은 결실을 맺었고 그 인재들 중에서도 정상들만 모인 국가대표팀 역시 마지막 결실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브라질이란 축구 제국은 이미 완벽하게 부활한 것처럼 보였고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 강했으며 모든 것이 브라질 제국의 세계 정복을 암시하는 듯 했다.
그렇게 높은 기대와 함께 시작된 1982 월드컵. '역사상 최강의 국가대표팀'이라는 찬사까지 듣던 산타나의 브라질 제국은 세계 정복의 마지막 깃발을 꽂기 위해 스페인으로 원정을 떠났다. 브라질은 1차 조별 리그에서 소비에트 연방(소련), 스코틀랜드, 뉴질랜드와 같은 6조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예상하던 대로 브라질은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했다. 소련을 2-1, 스코틀랜드를 4-1, 뉴질랜드를 4-0으로 부수고 3승 0무 0패, 10득점 2실점으로 여유롭게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소련과 스코틀랜드에게는 모두 선제골을 실점하였으나 크게 동요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여 역전승을 거두었다. 승리할 줄 아는 팀의 위닝 멘탈리티가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차 조별 리그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 또 다른 우승 후보 이탈리아와 함께 C조에 배정되었다. 브라질은 1차 조별 리그를 조 1위로, 나머지 둘은 조 2위로 통과했기에 이런 괴랄한 죽음의 조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브라질의 우승을 점쳤다. 어려운 상대들조차도, 단지 브라질이 왕좌로 가는 여정을 조금 더 극적으로 만들어줄 뿐이라고 여겨졌다. 그 누구도 브라질을 막아세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첫 상대는 아르헨티나였다. 직전 대회를 우승한 막강한 전력에 마라도나가 추가된 아르헨티나는 원래대로라면 브라질 못지 않게 훌륭한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는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포클랜드 전쟁 도중이었고, 아르헨티나의 군부 정권은 아르헨티나의 우세를 국내에 선전하고 있었으나 월드컵을 치르러 해외에 간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아르헨티나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아르헨티나의 패전으로 전쟁은 끝나고 만다. 조국의 패배를 알게 된 아르헨티나의 선수들은 당연히 제 컨디션으로 대회에 임할 수 없었고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1차 조별 리그를 조 2위로 간신히 통과하게 되었다.
절정의 브라질과 좌절한 아르헨티나의 승부는 예상대로 싱겁게 끝났다. 브라질이 3골을 연달아 넣었고, 아르헨티나는 종료 직전에 넣은 만회골로 만족해야만 했다. 브라질의 3-1 승리로, 브라질은 준결승 진출이 가까워졌고 이미 이탈리아에게도 2-1로 패배했던 아르헨티나는 조 꼴찌 탈락이 확정되었다. 브라질에게 남은 관문은 이제 이탈리아 뿐이었고, 브라질이 무난하게 이기고 준결승에 진출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만약 브라질이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득실차에서 브라질이 1점 앞서기에 양팀이 비기기만 해도 브라질이 준결승으로 가는 상황이었다.
이탈리아전은 지금까지의 그 어느 경기들보다도 어렵게 브라질을 괴롭혔다. 경기 시작 5분 만에 이탈리아의 파올로 로시에게 선제골을 실점했다. 12분에 소크라치스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25분에 다시 로시에게 실점하며 리드를 내주었다. 그렇게 한 점 뒤진 채로 전반전을 마쳤고, 추격하는 입장으로 후반전을 시작했다. 68분에 파우캉이 동점골을 넣으며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브라질이 올라가는 상황이 되었다. 지키기만 하면 준결승 진출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74분에 또 다시 로시에게 역전골이자 결승골을 내주며 위기에 빠졌다. 그리고 만회골을 넣지 못한 채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었고, 브라질은 3-2 충격패를 당하며 조 2위로 탈락하고 만다.
파죽지세를 달리던 무적의 셀레상이, 단 한 번의 패배로 위대한 도전을 마감했다. 이상적인 축구를 보여준 세계 최강의 팀이 이렇게 허무하게 탈락할 수 있는 것인가?
브라질의 탈락은 가히 충격을 넘어서 논리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더 강력하고, 더 아름답고, 더 매력적이고, 더 재미있고, 더 높은 수준의 축구를 보여준 브라질이 탈락하다니? 그들이 그동안 힘겹게 쌓아왔고 굳건히 믿어왔던 철학이, "스코어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다"라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명제에 의해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강한 팀이 탈락했다는 충격에서 그치지 않았다. 산타나와 브라질에게는 철학과 신념의 패배와도 같았다. 꿈 속의 신념에 취해 눈 앞의 승부를 경시한 대가는, 깨어난 뒤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쓴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산타나를 향한 수많은 비판과 그의 방식에 대한 회의론이 거세졌고, 그는 책임을 지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사임한 뒤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했다. 당시 석유로 인해 많은 부를 얻은 중동 국가들은 축구에도 자본을 투자하였고 정상급 네임밸류를 가진 여러 선수들과 감독들을 데려왔다. 산타나도 그 중 하나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아흘리에 부임하여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이 1982 FIFA 월드컵에서의 산타나는 당대와 현대, 브라질 현지와 전세계를 막론하고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당시 브라질의 탈락은 충격적인 비극으로 여겨졌지만,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부끄러워하는 국민들은 없었다. 수치스럽게 올라가느니 당당하고 명예롭게 탈락하는 것을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전의 경기 운영은 더 실리적이었어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비기기만 해도 올라가는 상황에서 동점골 득점 후 마지막 20분은 이전보다 더 안전한 운영을 했어야하는데, 이전처럼 높은 라인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운영을 유지했다가 또 한 번 실점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교체 카드도 이날 처참한 경기력을 보이던 세르지뉴를 빼고 공격형 미드필더 파울루 이시도루를 넣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산타나가 철학에만 매몰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승부에 신경을 썼다는 반론도 제기할 수 있다. 스트라이커 세르지뉴를 교체하고 대신 투입한 선수는 최전방 자원이 아닌 공격형 미드필더 파울루 이시도루였다. 그리고 이시도루는 다른 브라질 2선 자원들에 비해 수비적인 영향력을 갖춘 선수였다. 세르지뉴가 부진하여 교체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와 교체된 선수가 어떤 스타일이었는지는 간과한 채, 이 교체 작전을 단순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또한 교체를 실행한 시점 역시 동점골을 득점한 직후였다. 즉, 산타나는 동점 상황에서 이전보다 수비적인 운영으로 나머지 20분을 보낼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실리에 무신경했던 것이 아니다.
산타나와 셀레상 2
산타나에 대해 수많은 평가가 공존한 채로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1985년 여름, 그는 다시 한 번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고 지휘봉을 잡았다. 브라질 제국의 세계 정복을 향해 다시 출사표를 내던진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게임의 정신을 추구했지만, 과거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팀을 재정비하기도 했다.
1986 FIFA 월드컵에서의 전술을 1982 때와 비교해보면, 역동성을 조금 줄인 대신 중원 장악력을 더 확실하게 잡고자 한 전략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이아몬드 4-4-2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포백 보호에 능한 에우주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했고 주니오르와 알레망을 양쪽 메짤라로 기용했다. 그리고 십자인대 부상을 당한 지쿠 대신 소크라치스에게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겼다.
수비진에도 변화를 주었다. 지난 대회에서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았던 공격적인 리베로 에지뉴를 중용하며 중원에서의 수적 우위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으며, 양쪽 풀백 브랑쿠와 조시마르 역시 지난 대회에서의 풀백들보다 더 직선적인 유형이었다. 지난 대회에서 정통 윙어를 활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여 풀백에게 직선적인 오버래핑을 요구함으로써 윙어의 부재를 해소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공격진 역시 카레카와 뮐레르라는, 1980년대 후반 상파울루의 약진을 이끈 투톱 조합을 그대로 주전으로 가져가면서 정통 투톱 스타일을 채택했고 투톱 간의 호흡에도 더욱 신경을 썼다. 투톱 중 한 자리에 본래 레프트윙인 에데르를 기용했던 1982년과는 차이점이 뚜렷하다.
이렇듯 여러모로 산타나 1기와는 다른 방향성이 엿보인다. 산타나 1기의 전술은 윙어를 따로 두지 않는 4-2-2-2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2명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중앙과 측면을 오가고 투톱 중 1명이 왼쪽 측면으로 빠지며 4-2-3-1 형태와의 유기적인 전환을 노렸고, 양쪽 풀백 역시 사이드라인보다는 중원에 가담하며 하프스페이스 공략을 팀의 기조로 삼은 색채가 있었다. 그러나 산타나 2기의 전술은 다이아몬드 4-4-2를 바탕으로, 팀의 센터라인과 사이드를 비교적 명확하게 분리하여 중원의 확실한 장악을 노렸고, 양쪽 풀백의 직선적인 오버래핑과 킥을 활용하여 공격 루트의 다양화를 내세웠다.
또한 팀의 기강을 잡기 위해, 훈련 지각 등 워크 에씩 문제를 일으키던 윙어 헤나투 가우슈 포르탈루피를 스쿼드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 전술적으로나, 관리적으로나 자유도를 중시하던 기존의 산타나보다 실용주의에 가까워진 모습을 보였다.
그럼 대회 본선에서의 브라질은 어땠을까? 지난 대회에서만큼 파괴적인 임팩트는 없었지만, 착실하게 경기를 장악하며 조별 리그를 3전 전승, 5득점 무실점으로 무난하게 통과했다. 16강에서는 폴란드를 4-0으로 대파하며 다시 한 번 브라질 팬들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8강에서는 난적 프랑스를 만나 1-1 무승부를 거두었고, 결국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산타나의 두 번째 도전은 막을 내렸다. 산타나의 두 번째 도전을 평가하는 여러 관점들이 있고, 탈락하는 과정 역시 승부차기라는 감독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발생했다는 정상 참작이 존재하지만, 결과론적인 관점에서는 우승을 노리는 브라질이 우승을 하지 못한 것은 실패로 규정된다.
한 번의 실패는 재기할 기회를 주지만, 두 번의 실패는 낙인과 오명을 줄 뿐이었다. 물론 브라질에서는 산타나의 능력과 업적을 높게 인정해주는 평가들이 많았지만 그와 동시에 '우승하지 못하는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브라질 언론들에 의해 '차가운 발'이라는 별명이 붙여졌고 그 이미지가 만든 감옥 안에 갇혀 실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 역시 그렇게 비극의 희생양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영원히 기록될 것처럼 보였다.
이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플라멩구, 플루미넨시, 파우메이라스를 떠돌며 1번의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우승과 1번의 타사 과나바라 우승을 거두며 저니맨으로 전락하나 싶었는데, 1990년 상파울루에 부임하며 그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텔레 시대"라고 불리는 상파울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텔레 시대와 상파울루 제국
한 때 브라질 축구의 스타 감독이었으나 실패한 퇴물이라는 오명을 쓴 산타나에게는 명예 회복의 기회가 절실했고, 상파울루 구단 역시 다해가는 팀 사이클을 다시 힘차게 돌려줄 지도자가 필요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시작되었다. 상파울루는 산타나에게 변화와 혁명의 준비가 된 선수단을 갖춰주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산타나 역시 구단의 트레이닝 센터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상파울루를 위해 바치기 시작했다.
상파울루의 지휘봉을 잡은 산타나는 상파울루의 에이스이자 소크라치스의 동생인 하이를 중심으로, 어리고 재능있는 선수들을 수급하며 세대 교체를 진행하였다. 구단 유스 출신의 다재다능한 윙어 카푸를 중용하였고 플라멩구에서 멀티 자원 레오나르두를 영입하여 마찬가지로 중용하였다. 또한 1980년대 후반 상파울루의 에이스였던 뮐레르를 다시 복귀시켰다.
충분히 재능 있는 선수들로 스쿼드를 꾸린 산타나는 그 스쿼드를 진정한 자신의 군단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산타나는 선수들에게 전술적으로 많은 제약을 걸지 않는다. 높은 자유도를 부여하는 대신,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매우 높은 수준과 실수 없는 안정감을 요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수들을 반복적으로 강도 높게 훈련시켜야 했다. 어쩌면 고집으로 보일 수 있는 그의 완벽주의는 선수들과 마찰을 빚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조차도 훌륭한 인품이라는 무기로 해결했다. 선수들을 강하게 훈련시키는 동시에 선수들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고 선수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며 선수단 전원이 서로를 동료이자 친구로 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또한 팬과 언론을 대하는 자리에서도 선수단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았으며 선수들이 생활하는 환경에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마치 경비원처럼 훈련장을 관리하고 해충을 잡으며 그 어떤 방해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단에게 자신의 전부를 쏟으며 헌신했고, 그 대가로 구단의 모든 것에 관여하며 상파울루라는 구단을 텔레 산타나라는 이름 아래에 하나로 단결시켰다. 선수들의 기술 수준과 함께 팀의 조직력과 분위기 역시 최고조에 달했다.
산타나의 팀은 1991시즌 곧바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하이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한 4-3-3 내지는 4-2-3-1 포메이션을 메인 시스템으로 삼았는데 양쪽 풀백의 오버래핑과 윙 포워드들의 컷인 플레이를 활용하여 공격 진영에서의 수적 우위를 만들고 넓은 스페이스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 포백 시스템의 기본적인 기조와 유사했다. 전국 리그인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에서 19경기 11승 4무 4패, 26득점 14실점으로 승점 26점을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으며, 4팀이 참가하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 아틀레치쿠 미네이루를 상대로 1차전 1-1 무승부, 2차전 0-0 무승부를 거뒀으나 정규 시즌 순위가 더 높았던 상파울루가 결승에 진출했다. 구단 역사상 3번째 전국 리그 우승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브라간치누와의 결승전, 1차전에서 마리우 틸리쿠의 득점에 힘입어 상파울루가 1-0으로 승리했다. 이어진 2차전에서, 승리보다는 확실한 무패가 더 중요했던 산타나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4-4-2 또는 4-2-2-2로 볼 수 있는 포메이션을 채택하여 비교적 안전하고 수비적인 운영을 한 것이다. 원래 라이트백이었던 카푸를 미드필드 라인으로 올려 기용하였고, 기존의 쓰리톱에서 1명을 제외하여 투톱으로 변경하였다. 그렇게 승부에 집중한 산타나는 의도한 대로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합산 스코어 1-0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는 더욱 강력한 기세를 밀어붙였다. 2개의 조로 나뉘어 진행된 1라운드에서는 26경기 17승 8무 1패, 50득점 20실점으로 승점 42점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전체 1위에 올랐다. 이후 4팀씩 2개조로 진행된 2라운드에서 6경기 3승 3무 0패로 조 1위를 차지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는 2라운드에서 6전 전승을 기록하며 무시무시한 페이스를 과시하고 있었던 코린치앙스였다. 그러나 결승은 예상 외로 싱겁게 끝났다. 1차전 원정 경기에서 에이스 하이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상파울루가 3-0 대승을 거두었다. 2차전은 0-0 무승부로 끝났고 합산 스코어 3-0으로 상파울루가 코린치앙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하이는 총 20골을 기록하며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에 올랐고 자신이 현재 브라질 최고의 선수임을 증명해냈다.
산타나가 이끄는 상파울루는 첫 시즌부터 주립 리그와 전국 리그를 동시에 제패하며 역사적인 시즌을 만들어냈다. 또한 산타나는 브라질 축구계의 4대 주립 리그를 모두 우승한 최초이자 유일한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파울루 제국의 서막에 불과했다. 앞으로 그들이 정복할 목표는 남아메리카 대륙과 전세계이기 때문이다.
1992시즌을 앞두고 스쿼드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주로 레프트백을 보던 멀티 자원 레오나르두가 떠났고 신예 공격수 팔리냐를 영입했으며 산타나와 셀레상에서 함께했던 베테랑 미드필더 토니뉴 세레주를 영입했다. 또한 브라간치누로 장기간 임대되어 브라간치누의 약진에 기여했던 미드필더 핀타두가 임대에서 복귀했으며 기존 선수단 구성원들 중 입지가 줄어든 선수들 여럿을 처분했다. 또한 라이트백과 라이트윙을 오가며 좋은 활약을 보여준 유틸리티 플레이어 카푸를 본격적으로 라이트윙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4-2-3-1 포메이션을 사용하였는데, 제티가 골문을 지키고 그 앞에 비토르, 아지우송, 호나우당, 호나우두 루이스의 포백 라인이 위치했다. 그 앞에는 핀타두와 토니뉴 세레주가 더블 볼란치를 구성했다. 그 앞에 하이가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았고 카푸와 뮐레르가 양쪽 윙, 팔리냐가 최전방을 맡았다. 그러나 일반적인 4-2-3-1과는 달랐다. 팔리냐와 뮐레르 모두 중앙의 처진 위치와 좌측면에서 활약하는 타입, 즉 두 선수의 동선이 겹쳤다. 그래서 두 선수의 포지션이 각각 나뉘어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전방 중앙과 좌측면을 아우르는 넓은 영역을 두 선수가 공동으로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시작된 시즌.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에서는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대회들에서는 극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26경기 14승 8무 4패, 43득점 22실점이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1라운드를 1위로 통과하였고, 2라운드에서는 6경기 5승 1무 무패, 14득점 4실점이라는 훌륭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1조 1위로 마쳤다. 파우메이라스와의 결승에서는 1차전 원정에서 4-2 승리, 2차전 홈에서 2-1 승리를 거두며 합산 스코어 6-3으로 여유롭게 우승을 차지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조별 리그 2조에서 6경기 3승 2무 1패, 11득점 5실점을 기록하며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하였고 토너먼트에서 나시오날, 크리시우마, 바르셀로나 SC를 모두 꺾고 결승에 진출하였다. 결승에서는 뉴웰스 올드 보이스를 만났는데, 신예 감독 마르셀로 비엘사가 이끄는 뉴웰스 올드 보이스는 어쩌면 상파울루보다도 더욱 공격적인 팀이었다. 상파울루는 1차전 원정에서 1-0 패배를 당했으나 2차전 홈에서 1-0 승리로 만회하였고 승부차기에서 3-2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시즌의 대미를 장식할, 대망의 인터콘티넨탈 컵이 왔다. 상대는 역시 구단 역사상 첫 유로피언 컵을 들어올린, 요한 크라위프가 이끄는 전설의 드림 팀 바르셀로나였다. 스토이치코프에게 선제골을 헌납하였으나 하이의 멀티골로 역전하며 2-1 승리를 거두며 세계 챔피언의 왕좌에 올랐다. 이 경기는 아름다운 축구라는 신념을 가진 두 감독의 대결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산타나의 상파울루가 경기력과 결과에서 모두 완승을 거두며 상대 감독인 크라위프에게 "차에 치여야만 한다면 페라리에 치이는 것이 제일 낫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산타나의 상파울루가 진정 세계 챔피언의 왕좌에 오르는 순간이었고, 산타나에게는 10년 전 스페인에서의 그 아픔을 씻어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즌에는 스페인에서 열린 몇몇 소규모 친선 대회에 참가하여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레알 마드리드를 4-0으로, 바르셀로나를 4-1로 대파한 것이 압권이었다. 이 시즌 상파울루는 모든 대회를 통틀어서 84경기 45승 21무 18패, 133득점 73실점이라는 훌륭한 전적을 기록하며 세계 챔피언에 걸맞은 포스를 발산했다. 강한 전력의 팀들을 상대로도 오히려 경기 내용과 결과 모두 잡아내는 엄청난 팀이었다. 브라질의 축구 잡지 '플라카르'는 이때의 상파울루에 대해 "상파울루는 오늘날 상대 팀보다 훨씬 앞서 있다."라고 극찬했다.
그 다음 1993시즌 역시 상파울루에게 있어서 최고의 시즌이었다.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코파 두 브라질, 코파 지 우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인터콘티넨탈 컵에 참가하였고 모든 대회와 기타 경기를 통틀어서 1시즌 동안 무려 98경기를 소화했으며 8개의 대회 중 국제대회인 4개를 우승하며 국제대회 4관왕을 차지한 유일무이, 전무후무의 팀이 바로 이 때의 상파울루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뉴웰스 올드 보이스, 플라멩구, 세로 포르테뇨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여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까지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인디펜디엔테, 그레미우,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여 플라멩구와 접전을 펼쳤고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레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크루제이루와 1, 2차전 모두 무득점 무승부를 기록하였으나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는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팀인 AC 밀란을 3-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4관왕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에 이어 AC 밀란까지 격파하며 당대 유럽의 양대 산맥을 모두 꺾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또한 1시즌에 메이저 국제대회 4개를 우승하는 축구 역사상 유일무이,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하였다.
이 때의 상파울루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잦은 선수단 구성 변화와 로테이션이다. 시즌 전과 중도에 모두 선수들의 이적이 있었다. 핵심 미드필더 하이의 이탈이 가장 치명적이었는데, 산타나는 하이의 공백을 무리 없이 메우며 시즌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이가 맡았던 역할과 비중을 다른 공격진 동료들에게 골고루 분산시켰으며 이 덕분에 라이트윙 카푸가 무려 19골을 득점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카푸의 기량이 만개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도 AC 밀란이 자랑하는 수비진을 화려한 드리블로 유린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의 공백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었기에, 2년 전 팀을 떠났던 레오나르두를 다시 복귀시켰다. 떠나기 전에는 레프트백으로 주로 뛰었던 레오나르두였지만 돌아온 뒤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체제를 맞이한 1993시즌의 후반기가, 산타나의 용병술이 정점을 찍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스쿼드가 많이 개편되기도 했지만 여러 국제대회와 친선 경기로 인해 엄청난 경기 일정을 소화해야했기 때문이다. 특히 4월에는 30일 동안 무려 16경기를 치러야만 했다. 당연히 혹사와 로테이션이 강제되었고 산타나는 그 난관을 모두 극복하며 4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는 아예 토니뉴 세레주를 공격형 미드필더로 올리며 레오나르두와 함께 2선 조합을 형성하고 마치 1982 월드컵을 연상시키는 4-2-2-2 포메이션을 선보였다.
그렇게 산타나가 이끄는 상파울루는 세계 축구계의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브라질 클럽이 2번 연속으로 세계 챔피언에 오른 것은 과거 펠레의 산투스 이후 처음이었다. 산타나는 단순한 명예 회복을 넘어서 아예 브라질 축구계의 존엄한 거장에 올라섰으며 팬들은 모두 그를 "마스터"라고 불렀다.
이어진 1994시즌도 상파울루는 우승을 노렸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파우메이라스, 우니온 에스파뇰라, 클루브 올림피아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여 아르헨티나의 명장 카를로스 비앙키가 이끄는 벨레스 사르스필드와 맞붙었다. 원정 1차전에서 1-0 패배를 당하며 흔들렸고, 홈 2차전에서 1-0으로 승리하며 승부의 균형을 맞추었으나 이어진 승부차기에서 5-3으로 패배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러야만 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연패의 꿈을 아깝게 놓치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 시즌은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우승으로 만족했다.
그 이후로 상파울루의 황금기 사이클은 끝이 났고, 산타나가 이끄는 '텔레 시대'에도 끝이 찾아왔다. 1996년 1월, 그는 뇌허혈을 앓기 시작했고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축구 커리어 역시 끝났다.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젠가 다시 축구계에서 일할 수 있다고 믿을만큼 축구에 대한 열정이 엄청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믿음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2006년 4월 21일, 합병증을 유발한 장 감염으로 인해 그는 벨루오리존치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텔레 산타나가 이뤄낸 영광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1992, 1993
인터콘티넨탈 컵 - 1992, 1993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1993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 1993, 1994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 1971, 1991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 1991, 1992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 1969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 1970, 1988
캄페오나투 가우슈 - 1977
엘 파이스 선정 세계 최고의 감독 - 1992, 1993
남아메리카 올해의 감독 - 1992
브라질 4대 주립 리그를 모두 우승한 유일한 감독
단일 시즌에 4개의 국제 대회를 우승한 유일한 감독
텔레 산타나는 어떤 감독인가?
"Jogo Bonito(아름답게 플레이하라)"라는 브라질 축구의 정신을 대표하는 지도자이자 전술과 훈련이라는 감독 업무의 양대산맥에서 모두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 희대의 명장이며 자신의 확고한 철학으로 세계를 정복한 신화의 주인공이다.
단순히 미학적인 아름다움만을 좇은 것이 아니라, 겉보기에 아름다운 높은 수준의 기술들이 승리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강함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산타나의 철학은 선수 개개인의 화려한 개인기와 소위 말하는 '축구력'들이 모여서 팀의 전력과 경기력을 이루고 그것이 승부를 결정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원칙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산타나에게 전술이란 선수들의 기량이 더욱 잘 발휘될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도구에 더 가까웠다. 선수들이 각 상황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끌어낼 수 있게 도와주고, 그 플레이가 팀이 필요로 하는 플레이와 합치되도록 최적화하는 것이다. 산타나에게 전술이란 그런 것이었다. 선수들이 플레이할 선택지를 제한하고 자유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산타나의 철학은 당대 유럽 축구계를 지배하던 일종의 '감독주의' 흐름의 대척점에 있었기에 더욱 낭만을 느끼게 해준다.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아리고 사키, 파비오 카펠로, 마르첼로 리피로 대표되는 그 시대 이탈리아 거장들의 계보를 보면, 공통적인 성향이 보인다. 마치 시계처럼 팀 단위의 정교함을 요구하는 엄격한 전술과 규율은 경기장 안팎에서 선수들의 자유를 묶어두었다. 독일의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어떤가? 소비에트 연방의 발레리 로바노우스키는 어떤가? 당대 유럽에서 이름을 날린 지도자들은 모두 엄격과 권위를 내세워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기를 원했다. 선수단 관리는 물론이고, 경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전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원했다.
필드 바깥에서 필드 안의 경기를 바라보는 감독의 관점에서, 경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것을 최대한 통제하여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다. 명장이란 경기장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노는 사람을 의미했고, 전술 발전의 역사는 감독의 손바닥을 넓히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당연했다. 이 역사는 카테나치오와 토탈풋볼, 조나 미스타, 그리고 아리고 사키의 혁명을 따라서 거의 종착지에 다다랐다. 이제 감독들은 통제 불가능의 영역을 용납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감독이 짠 판 위에서 움직여야만 했다. 개인의 천재성을 앞세운 판타지스타라는 존재들은 감독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텔레 산타나는 달랐다. 그의 팀에서는 11명의 선수가 모두 판타지스타가 될 수 있었다. 선수들의 모든 플레이를 통제하고 자유를 억압해야 감독이 비로소 경기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유럽 감독들의 믿음에 반대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선수들에게 높은 자유도를 주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대보다 높은 기술적 우위를 점했다. 그렇다고 그가 선수들을 풀어두고 방치하는 방목형 지도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골을 넣어 승리하라', '아름답게 플레이하라'라는 2가지 목표들을 주었다. 그리고 선수들이 그 2가지 목표를 동시에 이룰 수 있도록 전술의 판을 깔아두었다. 마치 구슬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듯이, 산타나의 전술 안에서 선수들이 펼치는 아름답고 화려한, 예측 불가능해보이는 플레이들은 한 편의 영화처럼 엮여 팀 플레이를 구성했다.
그는 통제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이용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강력한 통제를 걸었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불허했던 다른 감독들과 다르게, 그는 자유와 불확실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최종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그의 전술과 철학이 다른 감독들보다 더욱 고평가받아야하는 이유이다. 더욱 어렵고 불가능해보이는, '이상'이라고도 불리는 길을 그 홀로 걸어가서 마침내 성공해냈기 때문이다.
또한 엄격한 규율과 권위만을 내세웠던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는 선수 모두를 하나의 인격으로 대했던 덕장이었다. 그의 철학은 선수 개개인의 높은 기술 수준을 전제로 하기에 당연히 선수들을 강하게 훈련시켰다. 고강도의 훈련과 높은 조직력을 요구했다는 것은 다른 감독들과 같았다. 그러나 그 높은 강도를 유지하는 방식은 달랐다. 엄격한 규율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트레이닝 센터에서 생활하며 선수들을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소통했다. 인격적, 감정적인 교감 없이는 그들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상적인 훈련 세션은 경쟁의 강렬함과 감정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가 보여준 감독 스타일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감독의 모습에 너무나도 가까웠다. 지도자로서도, 예술가로서도, 사상가로서도 그는 완벽했다. 축구의 본질, 리더의 본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상을 꿈꾸고 실현한 사람은 적어도 축구계에서는 그가 유일하다.
축구에서의 이상과 현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맞다. 산타나가 이끈 셀레상은 여러 시각에서 분석될 수 있는 좋은 주제다. 산타나의 상파울루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시대를 지배한 왕조였지만, 산타나의 셀레상은 달랐다. 강력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미숙함으로 인해 탈락한 브라질 축구의 커다란 비극이라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아름답게 플레이하라"라는 브라질 축구의 거대한 근간을 더욱 확실하게 정립한 의미가 있다는 찬사도 존재한다.
상파울루에서의 성공 이후, 산타나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한 축구계의 어마어마한 거물이 되었고 더 이상 산타나를 실패자라고 부르는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과거도 이전보다 밝게 비춰질 수 있었다. 만약 산타나가 상파울루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셀레상에 트로피를 가져다주지 못한 '차가운 발'로 그대로 남았다면, 필자를 비롯한 현 시대의 사람들이 산타나의 셀레상을 비평할 때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산타나의 유산을 이어받은 브라질 팬들의 민심과는 별개로, 그의 유산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쓴소리를 참기 어렵다. 그가 상파울루에서 마침내 자신의 위대한 서사를 완결지었기에, 평범한 이상주의자의 실패로 남을 수도 있었던 것이 위대한 거장이 남긴 역사의 일부로 기록되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봐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셀레상에서의 산타나와 산타나의 셀레상은 그 시대에 한정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체 역사와 함께 보아야 한다. 진부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브라질 축구의 모든 역사 안에서 그 시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텔레 산타나라는 개인의 이야기 안에서 그 시대가 어떤 경험이 되었는지를 보지 못한다면 그 시대를 진정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단편적인 시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셀레상에서의 산타나는 분명 미완성의 존재였다. 그의 미숙함은 실패의 쓴맛을 불러왔지만, 훗날 그의 철학이 진정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한 경험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절망은 그의 가장 찬란한 순간과 함께 빛나고 있다. 미완성이 완성이 되는 과정은 놀랍도록 눈부시게 아름다웠으니 말이다. 이것이 그의 패배를 단순한 패배로 규정지을 수 없고, 그의 실패를 단순한 실패로 규정지을 수 없는 이유다. 적어도 훗날의 성공에게는 큰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이상을 꿈꾸는 이들은 늘 실패자라는 조롱과 손가락질 속에서 살아간다. 축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산타나와 비슷하게 아름다운 게임에 관한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굳세게 밀어붙인 이들은 모두 그것을 경험했다. 꿈을 꾸려면 침대에 누워 잠에 들어야하듯이, 이상을 좇으려면 현실 속에서 끊임없는 증명을 거듭해야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인생을 건 증명에 실패하고 만다. 실패 끝에 성공을 거두는 영광스러운 순간도 있지만, 그 성공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최후의 순간에는 비판 속에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동정과 함께 미화된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텔레 산타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그 역시 실패를 겪었고 누구보다 거센 비난을 견뎌냈다. 그렇게 그는 이상을 꿈꿨던 자들의 전형적인 결말을 맞이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증명에 성공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승리한 이상주의자, 성공한 이상주의자로서 지휘봉을 내려놓고 박수와 함께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그의 실패마저도, 추한 핑계를 대며 강제로 미화되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상처를 드러내며 성장 과정의 일부로 기록되었다.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마지막까지 승리한 단 한 사람, 거친 현실을 이상으로 돌파하여 유토피아에 다다른 단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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