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리뉘스 미헬스와 12사도, 영광의 아약스
하펠의 대성공, 그것도 부임하자마자 이뤄낸 업적에 크게 자극받은 미헬스는 큰 결단을 내린다. 바로 페예노르트의 4-3-3 포메이션을 아약스에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1970년 4월 아약스와 페예노르트의 에레디비시 맞대결, 더 클라시케르에서 미헬스는 하펠의 축구를 상대팀으로서 직접 체험하게 된다. 경기는 3-3 무승부로 끝났지만, 이 경기가 미헬스에게는 상당한 충격을 준 모양이다.
미헬스는 4-3-3 포메이션이 경기 장악력을 높이고 토탈풋볼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적합한 시스템이라는 것에 동의했는지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틀 자체는 하펠의 발명품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 틀에 선수들을 넣고 플레이를 구상하는 것은 자신의 색채가 매우 강하게 들어갔다. 선수들이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어느 위치에서나 최고의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그대로 구현되었다. 단지 기본적인 선수 배치와 공간 활용, 동선 관리 등의 방법론이 더 발전한 것이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아약스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선수진의 변화와 함께 차례로 살펴보자.
지금까지 아약스의 골문을 지켰던 헤르트 발스가 비테세로 떠나고 서브 골키퍼 헤인즈 스타위가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스타위는 필드 플레이에 비교적 활발히 가담하는 스위퍼 키퍼로, 일종의 두번째 리베로 역할을 했으며 아약스의 진정한 최후방 필드 플레이어나 마찬가지였다.
스위퍼 벨리보르 바소비치는 팀의 새 주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는 아약스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주장이었다. 덤으로 이전보다 더욱 경기 영향력이 증가하였다. 물론 수비 라인의 뒤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앞뒤를 오가며 넓은 영역을 커버했고 때때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발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바소비치의 위치를 강조하기 위해 당시 아약스의 4-3-3 포메이션을 간혹 1-3-3-3 포메이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스토퍼 배리 훌쇼프와 라이트백 빔 쉬르비어, 레프트백 뤼트 크롤은 이전과 비슷한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그리고 포메이션의 변화에 따라 이들이 전진하고 동료와 위치를 바꾸는 토탈 플레이는 더욱 잦아졌고 그 정도 또한 강해졌다.
3명의 미드필더는 기존의 헤리 뮈렌과 2명의 뉴 페이스로 구성했다. 뮈렌과 파트너를 이뤘던 니코 레인더르스는 여전히 스쿼드 멤버로 남아있었지만 이전처럼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수비형 미드필더에는 아리 한을 주전으로 기용하였다. 페예노르트의 빔 얀센과 비슷한 역할인데, 한은 얀센보다 더 화려하고 기술적인 선수였다. 얀센처럼 터프하게 커버하는 맛은 아니었지만 동료들과의 스위칭을 적극 활용해서 여러 위치에 나타났고 측면으로 빠져서 드리블로 전진하기도 했다.
중앙 미드필더 한 자리는 요한 네이스컨스가 새롭게 기용되었다. 많은 활동량과 공수 양면에 두루 걸친 넓은 활동 영역은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원조 격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네이스컨스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많이 뛰는 것이 아니고, 팀에 필요한 위치에 그때그때 정확하게 나타나서 팀이 필요로 하는 플레이를 하는 것에 있다. 특히 연속적인 패스 앤 무브와 시원한 전진 드리블을 활용하여 순식간에 파이널 써드 지역까지 공을 전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70-71시즌에는 아직 네이스컨스가 완전히 주전을 차지한 것은 아니고, 니코 레인더르스와 번갈아 나오며 서서히 비중을 늘려갔으며 간혹 풀백으로 나오기도 했다.
나머지 미드필더 한 자리는 천재 플레이메이커 헤리 뮈렌이 그대로 차지했다. 볼 컨트롤과 패싱, 슈팅 등이 두루 뛰어나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맹활약했다. 또한 양발을 모두 잘 쓰고 원 터치 플레이에 능해서 동료와의 연계를 더욱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었다. 주로 전방의 공격수들 뒤에서 대기했지만 상황에 따라 측면이나 후방으로 이동하기도 하였다.
피트 케이저르와 스야크 스바르트 역시 주전 윙어로 계속 나섰고, 중앙 공격수로는 요한 크라위프가 원톱으로 나섰다. 크라위프는 최전방의 파트너 없이도 홀로 공격을 이끌고 상대 수비진을 부술 수 있는, 다른 클래스에 있는 선수였고, 특히 미헬스의 새로운 토탈풋볼 시스템에서는 팀 동료 전원을 파트너 삼아 후방에서부터 팀 전체의 전진을 돕기도 했다. 미헬스의 철학을 필드 위에 구현해주는 야전 사령관이었다. 간혹 크라위프가 아예 미드필더 중 한 자리로 뛰기도 하였고 이 때는 정통 톱 디크 판 데이크가 중앙 공격수로 출전했다.
이렇게 새로운 아약스, 새로운 토탈풋볼의 시대가 열렸다. “글로리아 아약스”의 시작이다.
1970-71시즌 아약스는 리그에서 우승 경쟁을 이어갔고 KNVB컵을 우승했으며, 유로피언 컵에서도 티라나, 바젤, 셀틱,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여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와 맞붙었다. 아약스는 경기를 내내 지배했으며 이른 시간에 터진 판 데이크의 선제 결승골과 종료 직전에 터진 한의 쐐기골로 2-0 승리를 거두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유럽의 왕좌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트레블에는 실패하였는데, 다름아닌 하펠의 페예노르트가 리그 우승에 성공하며 아약스의 전관왕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로피언 컵 제패를 통해 전 세계에 토탈풋볼의 완성을 알린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웠다.
시즌 종료 후, 미헬스 감독은 바르셀로나로 떠났고 주장 바소비치도 은퇴했다. 미헬스의 후임으로는 루마니아 출신의 명장 슈테판 코바치가 부임했으며 바소비치의 빈자리는 독일산 용병 수비수 호어스트 블랑켄부르크로 메웠다.
이 외에는 자잘한 선수 교체는 있었지만 핵심 멤버들은 여전히 유지되었고, 네이스컨스와 로테이션을 돌던 레인더르스가 클럽 브뤼헤로 이적하면서 네이스컨스가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베테랑 윙어 스바르트도 슬슬 작별을 준비했으며 초신성 윙어 요니 레프와 출전 시간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레프는 점점 주전으로 도약했다.
이 뒤에 코바치 감독과 함께 트레블과 유로피언 컵 3연패를 이루었지만 자세한 과정은 이 글이 다루는 범위를 벗어나므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코바치는 미헬스의 유산을 이어받아 토탈풋볼의 계승자로서 아약스를 다시 한 번 정상으로 이끌었다.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꺾으며 유로피언 컵 리핏에 성공하고 에레디비시와 KNVB컵도 우승하며 네덜란드 축구 역사상 최초의 트레블을 이뤘다. 특히 요한 크라위프는 3개 대회 모두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1971-72시즌의 최강자에 올랐다. 또한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는 인디펜디엔테를 총합 스코어 4-1로 격파하며 우승하고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그 다음 1972-73시즌에는 유벤투스를 꺾고 유로피언 컵 쓰리핏을 달성했다. 리그도 우승했지만 이번에는 KNVB컵을 놓치며 전무후무한 2연속 트레블에는 아쉽게 실패했다.
아약스는 3시즌 동안 유로피언 컵 3회 우승, 에레디비시 2회 우승, KNVB컵 2회 우승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내며 축구 역사상 최강의 왕조라 불릴 만한 업적을 세웠다. 대륙 클럽 대항전 3연패와 트레블을 같은 기간에 달성한 메이저 축구계 유일무이한 팀이다.
그리고 1973년 여름, 요한 크라위프가 스승 미헬스의 부름을 받고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또한 베테랑 선수들의 노쇠화와 얇아진 뎁스 등이 맞물려 왕조의 사이클이 끝나가고 세대교체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렇게 아약스의 영광의 시대는 저물었으나, 아약스가 보여준 토탈풋볼의 정신은 계속 남아서 세계로 퍼졌다. 특히 바르셀로나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에서는 미헬스와 크라위프가 이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5. 가장 아름다운 라이벌
같은 시대에 네덜란드를 수놓은 미헬스와 하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들이면서 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간 라이벌리를 이루었다. 트로피 면에서의 최종 승자는 아약스의 시대를 만든 미헬스였지만, 팀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는데 들었던 시간과 구단에게 지원받은 투자의 규모를 생각해본다면 하펠도 자신의 엄청난 능력을 보여줬다.
이 둘은 또 가장 아름다운 라이벌이라고 칭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경쟁을 통해 만들어진 위대한 유산, 토탈풋볼의 존재가 가장 큰 이유이지만, 이 라이벌 구도 자체의 아름다움도 한몫 한다.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여러가지 있다.
미헬스는 강력한 권위와 리더십, 뛰어난 언변을 갖추고 있어 ‘장군’이라는 말로 수식되고는 했다. 선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표현했으며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다. 또한 "프로축구는 전쟁과 같다. 너무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패배한다"라는 명언을 남기는 등 세상과의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알렸다. 간혹 선수들과 함께 장난을 치는 유명한 일화들도 있지만, 이것들 역시 선수들과의 세밀한 소통과 팀 케미스트리 상승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는 권위를 사용하고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에 반해 하펠은 말로 표현하는 것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다. 그가 독일어밖에 할 줄 몰라 선수들과 네덜란드어로 소통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다. 그러나 독일어로도 소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그가 선수들에게 한 가장 유명한 말이 “말 그만하고 축구나 해!”였을까?
대신 하펠은 현장에서 더욱 선수들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다. 훈련에 더 많은 것을 쏟아부었으며, 과거에 기술적으로 높은 클래스의 선수였던만큼 선수들 개개인을 직접 지도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할애했다. 첫 훈련에서, 골대 크로스바 위에 병 몇 개를 올려놓고 축구공을 차서 병들을 모두 맞추어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말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권위를 만들어냈던 셈이다.
리더십 외에 전술적 접근법에서도 미헬스와 하펠의 성향은 차이를 보였다. 미헬스의 아약스와 하펠의 페예노르트에서 모두 뛰어본 테오 판 다위펜보데는 이 두 거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헬스는 게임 시작 시 전술적 계획을 개발하는 데 탁월했으며 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펠은 달랐습니다. 하펠은 경기에서 작동하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었고 우리가 플레이하는 동안 그것을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펠이 미헬스보다 게임을 훨씬 더 잘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미헬스는 경기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는 유형이라면 하펠은 거기에 더해 경기 도중의 변화를 잘 체크하고 유연하게 계획을 수정할 줄 아는 유형이라는 것인데, 대표적으로 판 다위펜보데는 위와 같은 말을 남기며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에서는 하펠을 훨씬 더 높게 평가했다. 그의 고독한 성격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펠은 정말 마법사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능력, 그가 이룩한 업적 모두.
이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공통된 이상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마침내 답을 찾아낸 두 사람. 이토록 아름다운 지도자 간의 경쟁이 있었는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6. 토탈풋볼의 두 거장
미헬스와 하펠은 두 가지 다른 형태의 토탈풋볼을 선보였다. 보통 토탈풋볼이라고 하면 전자의 것을 의미하지만, 하펠의 전술 또한 토탈풋볼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하는데, 이 시대에 미헬스의 아약스와 네덜란드가 구사한 토탈풋볼은 오늘날 많은 팀들이 구사한다고 생각하는 토탈풋볼과는 형태가 달랐다. 어느 정도 포지션의 틀 안에서 토탈 플레이를 요구하는 현대 축구와 다르게, 이 당시 처음 등장한 토탈풋볼의 개념은 필요하다면 포지션의 틀도 자주 부수며 진정한 의미의 토탈 플레이를 추구했다. 말 그대로 선수들을 임의의 위치에 갖다놓아도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시대에 따라, 감독에 따라 토탈풋볼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토탈풋볼은 특정 감독이 사용하는 특정 형태를 갖춘 개념이 아니다. 전술의 형태부터 아이디어, 기조까지 폭넓게 포괄하는 개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토탈풋볼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그 형태만큼 많이 바뀌어왔지만, 최대한 많은 시대를 아우르는 의미는 아마 ‘포지션 등의 제한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위치, 모든 역할, 모든 상황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 있게 하는 행위 또는 사상’이 아닐까 한다. 여러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플레이한다는 의미처럼, 여러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맞춰서 쓰일 수 있다.
그 중에서 미헬스가 구사한 전술로서의 토탈풋볼을 살펴보면, 이 토탈풋볼은 시스템 자체가 함유하고있는 근본적인 한계(극한으로 훈련되어있는 선수단이 필요하다는 높은 제한 조건, 체력적인 한계, 역습 허용 시 드러날 수 있는 큰 불안감, 선수의 주 포지션이 아닌 곳에서 뛰게 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한 비판 등), 그리고 당시의 토탈풋볼을 파훼하기 위해 등장한 몇 가지 수단으로 인해 그 형태 그대로 보편화되기는 어려웠다. 대신 토탈풋볼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전 세계 축구에 뿌려졌으며 이후 전술의 현대화의 밑바탕이 되었다. 현대의 축구 전술도 토탈풋볼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넓은 의미로 이 철학적인 근간 자체를 토탈풋볼이라고 부른다.
전술로서의 토탈풋볼을 보면, 오히려 현대 축구 전술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것은 하펠의 페예노르트였다. 미헬스의 팀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과한 스위칭으로 인해 팀의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포지션의 틀을 부수는 것이 불필요해보이기도 한다. 하펠의 팀은 현대의 기준에서 선수의 포지션을 과하게 벗어나지 않고 적절한 토탈 플레이를 구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4-3-3 시스템에서 각 포지션의 선수들이 수행하는 역할이나, 3명의 미드필더로 수월하게 진행하는 빌드업, 양 풀백의 오버래핑, 윙어의 컷-인 플레이, 전방에서부터 시작되는 압박 등은 현대의 전술 트렌드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미헬스와 하펠이 만들어낸 토탈풋볼. 그 당시의 토탈풋볼은 하펠이 핵심 아이디어의 일부를 제공했을지라도 분명 미헬스가 완성한 결과다. 그런데, 이 토탈풋볼의 가치가 단순히 그 시대의 지배력만이 아닌, 그 이후의 축구까지 이어지는 영향력에서 더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 시대의 토탈풋볼은 어떠한가? 우리 시대에서 토탈풋볼이 지니는 가치는 좁은 의미로서 특정 전술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우리는 한 시대를 지배한 토탈풋볼 전술이 아닌, 축구 자체를 재정립한 토탈풋볼 철학이 가진 영향력으로 토탈풋볼의 의미를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펠도 토탈풋볼의 주인공으로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 영향력의 결과로 발전한 현대 축구의 형태는 둘 중 누구와 더 가깝나? 오늘날 미헬스의 전술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은 없지만 하펠과 유사한 전술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미헬스의 아약스보다 하펠의 페예노르트가 남긴 유산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제한 없이 더 광범위하게 통한 것, 시대를 앞서나간 것은 하펠의 토탈풋볼이다. 대신 그 당시의 토탈풋볼의 주인은 미헬스다. 앞서 말했듯이 전술로 한정지어서 보면 미헬스가 토탈풋볼의 대명사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미헬스가 그걸 완성하고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미헬스의 토탈풋볼, 하펠의 토탈풋볼. 같은 단어에 주인만 다르지만 그 의미는 미묘하게, 그리고 아주 많이 다르다. 당신의 토탈풋볼은 어떠한가. 어느 쪽에 더 마음이 움직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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