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칼럼

윙어의 플레이가 확립된 역사

Griezee7 2023. 11. 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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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어는 참 매력적인 포지션이다. 측면을 공략하면서도 언제든지 중앙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개인의 기량으로 상대 수비를 직접 뚫는 것과 동료와의 연계로 빈틈을 만드는 것을 모두 상황에 맞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역할을 팀의 전술과 경기의 상황에 맞추어 플레이해야하는 포지션이 바로 윙어다. 또한 개인의 개성이 가장 돋보이는 포지션도 역시 윙어다. 이러한 윙어의 다양한 역할은 축구사 150년을 거치며 거듭 발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윙어의 변화 과정은 생각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다른 포지션들의 경우, 그 포지션에 한 획을 그은 몇몇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윙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수많은 사건과 함께 진보해왔고 이로 인해 몇몇 큰 사건을 중심으로 간단히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 결과 클래식 윙/인버티드 윙 등의 이분법에 가까운 구분으로 시대에 따른 윙어의 플레이를 규정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상당히 단순하고 편리하기에 어찌 보면 좋은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윙어의 변천사 전체를 보려면 이것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그리하여 축구사 장장 150년에 걸친 윙어의 변화 과정을 윙어의 플레이가 확립된 과정에 초점을 맞춰서 이 글에서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나름 최대한 요악하고 줄였다고 생각하지만, 꽤나 길고 복잡할 수 있기에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축구에서 포지션과 포메이션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 개념들의 사용은 매우 단순했다. 후방에서부터 2명, 3명, 5명을 일렬로 깔아놓는 2-3-5 포메이션에 맞춰서 선수들을 배치한 것을 포지션의 시초로 본다. 선수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 위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한 포지션의 선수는 그 위치에서 공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플레이했다. 

 

이 때 윙어는 어디에 있었을까? 전방의 공격수 5명을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아웃사이드 레프트, 인사이드 레프트, 센터 포워드, 인사이드 라이트, 아웃사이드 라이트라고 불렀고 이 중 아웃사이드 레프트와 아웃사이드 라이트를 합쳐서 아웃사이드 포워드라고 하며 이것이 윙어의 시초이다. 

 

5명의 공격수 중 좌우의 인사이드 포워드들은 조금 처진 위치에서 하프백과 포워드들 사이를 연결했고, 결국 센터 포워드와 2명의 아웃사이드 포워드들이 최전방을 맡았던 셈이 된다. 그럼 이 당시 아웃사이드 포워드의 역할은 최전방의 양쪽 측면을 담당하는 공격수였던 것이다. 

 

포지션에 따른 세부적인 플레이 방식의 차이는 크게 없었고, 그저 본인의 위치에서 공을 잡고 플레이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 즉 아웃사이드 포워드란 측면의 최전방 공격수, 측면의 스트라이커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당시 아웃사이드 포워드는 경기 내 비중이 큰 포지션은 아니었다. 특별한 지침이 없는 한, 중앙 포지션이 측면 포지션보다 경기 영향력이 대체로 우월할 수밖에 없다. 특히 초창기 잉글랜드 축구는 어땠는가? 거칠고 남자다운 몸싸움으로 경기장을 마치 전쟁터처럼 만들고, 신체를 향한 그 수많은 공격을 이겨내며 공을 잡고 홀로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따라서 팀에서 가장 축구를 잘 하는 선수는 보통 센터 포워드나 인사이드 포워드, 센터 하프 등 중앙의 포지션을 담당했다. 전장의 가장자리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자신에게 공이 떨어지면 넓은 빈 공간을 활용하여 득점을 노리는 아웃사이드 포워드는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다. 

 

그렇다면 윙어의 역할이 확장된 계기를 알아보려면, 아웃사이드 포워드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위상을 얻었고 이 포지션의 플레이 방식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인물을 알아봐야 한다. 그 선수를 알아보려면 19세기 말 영국 웨스트브로미치로 떠나보자. 

 

 

빌리 바셋(Billy Bassett)은 빠르고 재능 있는 공격수였지만 키가 불과 165cm밖에 되지 않는 신체적인 한계로 인해 어릴 때부터 주로 아웃사이드 포워드로 뛰었다. 1869년생의 바셋은 지역의 여러 아마추어 구단에서 뛰다가 1886년에 불과 17세의 나이로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FC와 계약을 맺었고, 팀의 주전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계속 출전하며 풋볼 리그 초창기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다. 

 

빌리 바셋

 

그는 빠른 스피드와 훌륭한 볼 컨트롤을 활용하여 효과적인 돌파를 자주 하였고 이로 인해 득점이라는 공격수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었으며, 측면에서 공을 소유하고 팀의 득점 기회를 창출하는 등 측면에서도 높은 경기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그는 윙어임에도 불구하고 슈퍼스타가 되었으며 윙어의 플레이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치 바셋이 새로운 플레이를 발명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최고 수준에서 윙어의 플레이의 폭을 넓힌 공로자라는 의미의 서술이므로 그 이상의 과대 해석은 지양하길 바란다. 바셋과 비슷한 세대의 다른 윙어들 중에서 바셋과 비슷한 플레이를 한 선수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런 플레이를 먼저 구사한 선수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보다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팀의 공격 기회 창출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위대한 윙어의 개척자라는 지위에 오른건 바셋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먼저 언급한 것이다. 

 

 

그렇게 확장된 윙어의 플레이를 더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시키며, 측면에서 공격 기회를 만드는 지원가로서의 윙어를 본격적으로 정립한 인물이 바로 20세기 초반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던 빌리 메레디스(Billy Meredith)다. 빠르고 볼 컨트롤 기술이 뛰어나서 윙어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다른 윙어들처럼 신체적인 약점이 명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린 시절 광산에서 일한 덕분에 강한 신체를 지녔고 이로 인해 몸싸움을 잘 버텼다. 

 

빌리 메레디스

 

단순히 스피드에 의존해서 수비를 제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이고 화려한 드리블로 끊임 없이 상대 수비를 괴롭혔으며, 민첩하고 균형 감각이 좋아서 빠른 드리블을 막힘없이 구사했다. 상대가 그를 거칠게 막으려고 해도 오히려 그의 힘에 상대 선수가 압도될 뿐이었다. 수비를 제친 뒤에는 정확한 크로스로 센터 포워드에게 득점 찬스를 제공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최고의 인기 선수가 되었고 상대는 중앙의 다른 선수가 아닌 측면의 메레디스를 최우선으로 경계하게 되었다. 측면에서 드리블로 상대 수비진을 돌파하고 크로스를 올려서 중앙에 득점 기회를 만든다는 소위 '클래식 윙'의 이미지는 바로 이 시기, 메레디스를 통하여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함께 공격수들의 역할 분담도 점차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공격수들이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득점을 노리던 방식에서 각자의 위치에 맞게 득점과 지원의 비중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골문 앞에 위치한 센터 포워드가 득점 찬스를 득점으로 연결하는 임무를 맡고, 인사이드 포워드들은 하프백과 센터 포워드 사이를 이으며 게임을 주도하고 찬스를 생성하는 임무를 맡고, 아웃사이드 포워드들은 측면에서 돌파와 크로스를 통해 중앙 공격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다. 이렇게 공격진의 분업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고, 축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세부적인 포지션별로 각 위치에 맞는 효율적인 플레이 방식이 정해졌고 이것을 기반으로 진화를 거듭해나가기 시작했다. 

 

 

윙어의 플레이 스타일이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세계적으로 전파된 것은 언제일까? 놀랍게도 비슷한 시기에 이미 영국 밖의 국가에서도 윙어들이 이러한 플레이를 하였다. 세간의 인식보다 과거 축구계의 국제적인 교류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기도 했고, 이러한 전술-전략적인 발전이 특정 국가의 주도 하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예전에 아르헨티나 축구의 전술 발전 역사에 대한 해외 칼럼을 찾아서 읽은 적이 있다. 남아메리카 축구는 전술보다는 개인 기량에 의존하여 발전해왔다는 세간의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매우 좋은 글이었는데, 그 중에서 인상깊은 대목이 바로 20세기 초반의 윙어와 연관된 내용이었다. 에스투디안테스의 공격수 알레한드로 스코페지(Alejandro Scopelli)는 1928년 라싱 클루브와의 경기를 회상한다. 

 

"그날 우리의 주장인 놀로 페레이라(Nolo Ferreira)는 필드에 나가기 전에 우리를 모아 라싱의 오른쪽 윙어 나탈리오 페리네티(Natalio Perinetti)를 완전히 혼자 내버려 두라고 지시했다.
왜냐하면 그 선수의 특징은 항상 안쪽으로 파고들지 않고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키가 큰 수비수들이 있었고 라싱의 공격수들은 모두 우리보다 키가 작았다.
그 계획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윙은 우리 수비수들이 어려움 없이 막아내는 크로스를 오후 내내 시도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언론의 경우, 라싱의 오른쪽 윙어는 그날 경기장에서 최고의 선수였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1920년대에 아르헨티나에서도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리는 클래식한 윙어의 플레이가 하나의 스타일로서 받아들여져 있었다.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개성으로 장착한 스타 플레이어도 있었고, 그것을 막기 위해 수비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윙어를 직접 막는 것에 집중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윙어의 플레이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오히려 방치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윙어를 무력화시킨 전술은 매우 흥미로우며 훗날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단순히 상대방의 플레이 그 자체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뒤에 감춰진 의도와 목적을 읽고 경기의 전반적인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 글의 소재인 "윙어"의 관점에서 보자면, 윙어는 어디까지나 지원가일 뿐 경기를 결정지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 저 사례에서 드러난다. 윙어가 아무리 수비진을 돌파하고 질 좋은 크로스를 제공해주어도 결국 득점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아군 센터 포워드와 상대 수비수들의 신장 차이라는, 윙어 자신의 수준과는 완전히 무관한 요소가 윙어를 무력하게 만든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 결국 윙어는 팀 공격의 퀄리티를 향상시켜줄 수는 있어도 그러한 윙어의 플레이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중앙의 동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골대와의 거리가 멀고 바라보는 시야각도 제한적이기에, 중앙의 선수들에 비해 만들어낼 수 있는 득점 기회의 폭도 좁다. 이 말은 즉슨 윙어의 플레이가 시각적으로는 개성이 뚜렷해보일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팀에 큰 변수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단조로운 찬스 메이킹의 반복일 뿐이라는 것이다. 윙어, 아웃사이드 포워드는 스스로 경기를 뒤집을 수 없는 수동적인 포지션이었다. 측면의 지원가라는 기본적인 역할의 한계를 깨기 위해서는, 더 위대한 경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위대한 경지에 오른 인물들을 몇 명 간략히 소개할 것인데, 가장 먼저 소개할 인물은 이 사람이다. 라이문도 오르시(Raimundo Orsi)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에서 모두 엄청난 성공을 거둔 최초의 윙어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윙어 중 한 명이다. 빠른 드리블과 정확한 왼발 크로스라는 장점 때문에 주로 아웃사이드 레프트 위치에서 활약했지만, 그의 기량은 그곳에서만 뿜어져나온 것이 아니었다. 작은 체격으로 인해 힘과 체력이 다소 부족했지만, 순간적인 폭발력과 킥의 정확성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에 그 툴을 활용하여 다양한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골문 쪽으로 드리블하거나 아예 중앙 공격에 가담하여 정확한 슈팅으로 득점하는 것이 그의 장기였다. 때로는 우측면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중앙으로 파고든 이후 왼발 슈팅으로 득점하는 컷인 플레이를 시전하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커리어를 통틀어서 상당히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라이문도 오르시

 

그럼에도 그의 최대 장점은 역시 드리블이었다. 화려한 페인팅은 그의 시그니처와도 같았고, 그가 자신을 마크하는 상대 수비수를 바보로 만들 때마다 경기장의 모든 관중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상대 수비수와의 대치 상황에서, 그는 몰래 공을 바닥에 가만히 멈춰두고 자연스럽게 몸만 움직여 드리블 동작을 취했고, 상대 수비수는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그렇게 역동작을 유도하여 빈틈을 만들고 편하게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훌륭한 윙어의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은 바로 '드리블'과 '플레이의 범용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윙어 하면 떠오르는 것은 드리블이다. 드리블을 못한다면 뛰어난 윙어로 인정받기가 어렵다. 당연히 훌륭한 윙어의 기준에서도 드리블을 빼놓을 수 없고, 드리블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면 훌륭한 윙어가 되기 좋다. 그리고 그 드리블 돌파 이후에 가져갈 수 있는 선택지가 윙어의 경지를 가르는 핵심이다. 축구에는 예술 점수가 없다. 더 많은 득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팀의 득점 생산을 위해 윙어가 드리블 돌파 이후에 할 수 있는 행위가 무엇일까? 이 해답을 더 많이, 더 높은 수준으로 가지고 있어야 훌륭한 윙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전설적인 윙어들은 모두 이 두 가지 덕목에 충실했다. 다음에 소개할 선수들은 축구 종가 잉글랜드의 대표적인 두 윙어들인데, 이들 역시 이 두 가지 덕목들을 훌륭하게 갖추고 있었다. 특별한 점이라면, 이들은 이것들에서 각각 극한의 경지까지 도달한 선수들이다. 

 

 

스탠리 매튜스 경(Sir Stanley Matthews)은 드리블과 크로스라는 클래식한 이미지의 윙어로서는 그야말로 최고, 정상에 있던 사람이다. 명성에 비해 득점 수가 적고 왼발을 잘 사용하지는 못했으며 오직 정통파 아웃사이드 라이트의 기본에만 능력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 능력이 너무나 경이로웠다. 사실 그는 득점을 못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득점이 딱히 그의 목표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 역시 커리어 초창기에는 득점 또한 목표로 하는 공격적인 포워드였으며 꽤 많은 골을 넣었다. 그러나 기량이 뛰어난 그를 점점 상대 수비수들이 집중해서 막기 시작하였고, 포위망을 뚫기에는 다소 적은 공간이 허락된 측면 공격수였던 그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스탠리 매튜스 경

 

그는 득점에 대한 관심을 줄이는 대신, 활동 범위를 조금 뒤로 무르고 지원가를 자처하며 경기 영향력을 늘리는 선택을 했다. 드리블과 크로스를 통한 찬스 메이킹이 그의 주 무기가 되었고, 간간히 중앙으로 이동하여 패스로 게임을 풀어나가기도 했다. 그의 득점 수는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소했지만, 그의 퍼포먼스는 더욱 폭발적으로 뿜어져나왔다. 뛰어난 볼 컨트롤과 빠른 스피드, 탄탄한 기본기가 모두 결합된 그의 화려한 드리블은 그야말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상대 수비수들은 속수무책으로 뚫렸고 관중들은 매튜스에게 열광했다. 그가 돌파 이후에 페널티 박스 안으로 차는 정확한 크로스는 많은 찬스를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국민적인 영웅이자 축구계 최고의 슈퍼스타로 등극했다. 

 

 

톰 피니 경(Sir Tom Finney)은 플레이의 범용성과 다재다능함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만능 공격자원이었다. 주로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반대쪽 사이드에서도 활약했고 센터 포워드로도 활약했다. 즉 고전적인 공격 체계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해낼 정도로 활용도가 높았다는 얘기다. 그는 1부 리그에 있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의 약체인 프레스턴 노스 엔드에서 커리어의 거의 전부를 보냈다. 즉 혼자서 팀 전체를 이끌어야하는 고독한 에이스였는데, 이 분야에서 그는 아마 축구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보아도 최고의 경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떨거지'라고 불렸는데 10명의 떨거지와 함께 그는 2번의 리그와 1번의 FA 컵에서 준우승을 기록했다. 상당히 많은 득점을 직접 기록하기도 하였다. 

 

톰 피니 경

 

그가 하나의 장점만 갈고닦았다면 그렇게 경이로운 하드 캐리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여러 가지 장점들을 훌륭한 수준으로 갖추고 있었고 그것들을 적절한 상황에 끊임 없이 발휘하여 팀의 경기력과 성적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드리블과 크로스는 물론이고 직접 슈팅을 통한 득점과 패스를 통한 플레이메이킹 등을 모두 우수하게 해냈으며 특정 위치에 머물지 않고 넓은 범위를 이동했다. 그것도 공격진의 모든 포지션을 번갈아가며 출전하면서. 또한 당연하게도 그는 상대 팀에게 압도적인 1호 경계대상이었으니, 수많은 집중 견제와 태클을 이겨내야만 했다. 측면에서 일대일의 드리블을 주로 해야했던 다른 윙어들과 다르게, 그는 여러 수비수의 마크에 시달리며 일대다수의 드리블에 익숙해졌다. 아마 일대다수의 드리블에 있어서는 당시 기준으로 그가 역사상 최고였을지도 모른다. 강한 태클을 견디고 쉽게 넘어지지 않으며, 최대한 신체 접촉을 피하는 밸런스적인 드리블을 구사했다. 

 

폭우 속에서 펼쳐진 경기, 미끄러지면서 상대의 수비수들을 제치는 톰 피니 경의 전설적인 장면

 

 

이 두 선수는 나이 차이가 꽤 있었지만, 오래 롱런한 덕에 활약 기간이 상당히 겹쳤다. 당대의 축구 팬들은 종종 매튜스의 드리블과 피니의 다재다능함을 두고 누가 더 뛰어난 선수인가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질 수 있고 쉽게 결론을 내기 어려운 주제이다. 그래도 홀로 팀을 이끄는 능력, 소위 말하는 '캐리력'에 있어서는 피니가 더 뛰어났다는 것이 중론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는 달리, 실제로 더 인기를 누린건 더 화려한 드리블을 구사하던 매튜스였고, 매튜스는 이런 대단한 인기에 더해 엄청난 자기관리로 인한 경이로운 롱런 덕분에 더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의 높은 명성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초대 발롱도르를 그에게 시상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확실한 것은, 그들과 같은 여러 위대한 윙어들과 함께, 윙어라는 포지션은 발전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대표적인 예시로서 매튜스와 피니 경들을 언급한 것이지, 그들이 이 글의 '메인 디쉬'는 아니니까 그들의 비교에 지나치게 매몰되지는 말자. 

 

 

또한 측면 공격수의 근본적인 역할이었던 득점을 계속해서 주로 수행했던 선수들도 있었다. 클리프 바스틴(Cliff Bastin)은 1930년대 아스날 왕조를 이끈 아웃사이드 레프트이자 인사이드 레프트로 매우 훌륭한 기량을 지닌 에이스였는데 뛰어난 슈팅과 골 감각을 통해 매우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윙어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1997년까지 아스날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자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참 대단한 선수다. 

 

클리프 바스틴

 

 

그렇다면 윙어가 팀 내에서 가지는 비중은 어느 정도였을까? 앞서 설명한 오르시, 매튜스, 피니, 바스틴과 같은 경우에는 팀의 간판 스타이자 에이스였고 당연히 팀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였다. 특히 매튜스와 피니 경들은 우승과는 거리가 먼 약팀을 홀로 이끄는 알파이자 오메가의 존재였다. 

 

이렇게 중앙 포지션의 선수들을 제치고 팀에서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들도 있던 반면에 주인공을 보좌하는 조연으로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윙어들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엇갈렸을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축구계의 주연과 조연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1940년대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강팀이었던 리버 플레이트는 '라 마키나'라고 불리는 최강의 공격진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공격진의 유기적인 스위칭과 공간 활용을 통해 상대 수비를 해체하고 득점을 생산해냈는데, 그 과정의 중심에는 중앙의 호세 마누엘 모레노(José Manuel Moreno)와 아돌포 페데르네라(Adolfo Pedernera)가 있었지만 명품 조연으로 활약한 양쪽 윙어들 역시 크게 주목받았다. 아웃사이드 레프트 펠릭스 루스타우(Félix Loustau), 아웃사이드 라이트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Juan Carlos Muñoz)의 이야기다. 

 

라 마키나, 왼쪽부터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 호세 마누엘 모레노, 아돌포 페데르네라, 앙헬 라브루나, 펠릭스 루스타우

 

이들은 사이드라인을 따라 수직적으로 움직이는 동선을 벗어나서, 중앙의 최전방 혹은 2선에도 접근했다. 스위칭 플레이를 통해 순간적으로 창출해낸 공간을 기습적으로 침투하는 것은 주로 앙헬 라브루나(Ángel Labruna)의 역할이었으나, 때때로 루스타우와 무뇨스 역시 침투하여 득점을 노렸고 이 윙어들은 적극적으로 중앙을 공략하며 수비진의 주의를 끌어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특히 루스타우가 이러한 플레이에 뛰어났고 그는 아예 후방으로도 영향력을 뻗으며 수비에도 가담했다. 무뇨스의 경우에는 라 마키나의 바로 직전 세대이자 라 마키나의 영감을 던져준 선배 카를로스 페우셀레(Carlos Peucelle)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루스타우는 라 마키나의 대표적인 명품 조연으로, 중앙의 세 공격수 못지 않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럼 루스타우는 당대에 최고 윙어라는 평가를 받았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그 평가에 가까웠던 인물은 바로 엔리케 가르시아(Enrique García)다. 로사리오 센트랄과 라싱 클루브에서 맹위를 떨친 에이스였던 가르시아는 현란한 테크닉을 자랑하던 최고의 크랙이었고 매혹적인 드리블과 왼발 킥, 상대에 대한 도발적인 태도와 화려한 언변으로 인해 당대에 매우 큰 인기를 얻었다. 

 

엔리케 가르시아

 

그는 전술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발산하는 플레이로 유명했는데, 사이드라인을 따라 코너까지 돌파한 뒤 페널티 박스 안까지 드리블로 뚫고 들어가기도 하고, 일부 플레이에 제한이 있던 당대의 장비로 러닝 크로스를 자주 시도하는 등 혁신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커리어하이 시즌인 1938년에는 32경기 20골을 기록할 정도로 득점력까지 갖추었다. 또한 이 모든 플레이를 거의 왼발만 사용했다고 하며, 오른발은 막대기나 목발로 묘사될 정도로 거의 쓰지 않았다. 이로 인해 "왼쪽 다리의 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엄청난 재능으로 솔로 플레이를 즐겨하며 팀의 공격을 이끌던 '주인공' 가르시아는 기계와 같은 공격진의 한 부품으로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조연' 루스타우보다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인기와 스타성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더라도 팀 내에서 비중이 높고 혼자 해낼 수 있는 플레이가 많은 가르시아가 더 높은 경기 영향력을 지녔으리라고 판단하는게 더 합리적이기도 하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프트윙이었습니다. 어쩌면 펠릭스 루스타우가 팀에 더 나았을 수도 있지만 Chueco는 필드의 포지션에서 더 나았습니다."
-단테 판제리(Dante Panzeri)

 

 

여기서 Chueco는 가르시아의 별명으로 그를 지칭한다. 가르시아를 역대 최고의 레프트윙으로 평가하고, 루스타우와 간략히 비교하는 내용의 어록이다. 루스타우가 팀에 더 나았다는 말은 여러 의미의 해석이 가능하다. 팀 플레이어로서 더 뛰어났다, 혹은 더 좋은 팀에서 좋은 커리어를 보냈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즉 팀에 더 이타적으로 기여하여 좋은 팀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은 루스타우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그 포지션에서 더 훌륭한 플레이어는 가르시아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당대의 사람들에게 더 뛰어난 선수로 인정받은건 엔리케 가르시아였고, 그는 더 나아가 역대 최고의 레프트윙 반열에 올라섰다. 물론 그게 1940년 언저리의 시점이기에 그 이후로 매우 많은 선수들이 그의 위상에 도전했고 지금은 그를 그 정도로 평가하는게 쉽지 않아졌지만. 

 

 

시대와 지역, 팀과 포지션을 막론하고, 주연이 조연보다 더 높은 평가와 대우를 받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윙어라는 포지션은 그 위치의 특성 상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명확하게 되는 편이기에 동포지션 선수들을 평가하는 일종의 쉬운 가이드라인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축구란게 그렇게 항상 단순하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팀 내에서의 비중이 다르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고, 아예 주/조연의 차이로 극복할 수 없는 실력의 격차가 존재할 수도 있다. 어쩌면 역할론의 한계일 수도 있다. 플레이 스타일 관점에서 봤을 때의 주/조연이 실제 팀 내 비중 관점에서의 주/조연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문제를 매우 잘 드러내는 예시가 바로 1950~60년대 브라질 축구계의 레프트윙 삼두마차이다. 마리우 자갈루(Mário Zagallo), 주제 마시아 페페(José Macia Pepe), 카뉴테이루(Canhoteiro)가 바로 그들이다. 

 

 

마리우 자갈루는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월드컵을 우승한 최초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의 선수 시절만을 다룬다. 체격이 작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전형적인 윙어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가 그 기술력을 활용하는 방식은 다소 특이했다. 폭발적인 드리블 돌파가 비교적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그는 다른 윙어들처럼 측면을 집중적으로 치는 것보다는 중앙을 포함한 넓은 영역에서 경기에 관여하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채택했다. 축구 지능이 훌륭하고 넓은 영역을 커버할 지구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마리우 자갈루

 

자갈루가 팀의 중앙 공격에 가담하며 생긴 좌측면의 공간은 레프트백 니우통 산투스가 오버래핑하는 무대가 되었고, 자갈루는 중앙에서 다른 포워드들과 함께 찬스를 만들뿐만 아니라 오버래핑한 니우통 산투스와도 연계하며 다방면으로 공격을 전개했다. 또한 후방으로도 영향력을 발산하였는데, 적극적으로 중원 싸움에 힘을 보태거나 수비에 참여하는 허슬 플레이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자갈루를 수비형 윙어로 잘못 규정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자갈루의 기술과 창의성 등 공격적인 재능을 본다면 적절하지 못한 판단이다. 자갈루는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측면 플레이메이커 정도로 분류해야할 선수다. 

 

주제 마시아 페페는 측면 돌파라는 윙어의 기본 임무는 그대로 수행하지만 거기에 더해 중앙 침투와 강력한 슈팅으로 직접 득점을 노리는 윙 포워드 성향의 공격적인 윙어였다. 폭발적인 드리블 능력과 '빌라의 대포'라고 불리는 강력한 왼발 슈팅, 최전방과의 연계 능력으로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측면에서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는 컷인 플레이에 능한 선수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윙 포워드와 유사하지 않느냐는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오늘날의 윙 포워드는 대체로 측면에서 반대 방향으로 '접고' 안으로 파고들어 2선 중앙에 가까운 위치로 점점 조여가는 인버티드 성향이 강한 역발 윙어지만, 당시의 윙 포워드는 대체로 정발을 사용하며 최전방으로 곧바로 침투하거나 어려운 각의 위치에서도 기습적인 중장거리 슈팅을 날리는 성향이 강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주제 마시아 페페

 

카뉴테이루는 클래식한 레프트윙 스타일로 정점에 오른 선수였다. 그의 본명은 주제 히바마르 지 올리베이라(José Ribamar de Oliveira)이고 카뉴테이루는 별칭이었는데, 그 별칭인 카뉴테이루는 '왼발잡이'라는 뜻이다. '왼발잡이'가 그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을 정도로 그의 왼발은 사실상 그의 정체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좌측면에서의 현란한 드리블과 정확한 크로스와 슈팅으로 팀의 공격을 다양하게 이끌었는데, 이러한 만능 윙어로서의 기량은 마치 반대쪽 측면의 최고의 선수들인 줄리뉴(Julinho)와 가린샤(Garrincha)를 연상시켰다. 그는 툴이 다양했고 팀에서 에이스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폭발적인 캐리력을 자랑했다. 그가 상 파울루에서 뛰던 1958년, 폭우 속에서 펼쳐진 산투스와의 경기에서 그와 펠레가 각각 2골씩 득점하며 거둔 2-2 무승부는 희대의 명승부로 회자된다. 

 

카뉴테이루

 

 

그럼 이 세 명의 위대한 윙어들 중,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는 누가 주전 레프트윙으로 선택받았을까? 일반적인 역할론으로는 소속 클럽에서의 비중이 높은 순서대로 기회가 주어졌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에 따르면 카뉴테이루가 주전이 되어야하고 자갈루는 소집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실제로 셀레상(Seleção,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별칭)의 주전으로 선택받은건 마리우 자갈루였다. 자갈루는 나머지 둘보다 섬세한 플레이메이커 스타일이었고 이타적인 성향이 있었으며 수비적으로도 밸런스를 맞춰줄 수 있었기에, 전술적인 카드로 낙점된 것이었다. 그래도 백업 멤버로 2차례의 월드컵에 참가한 페페와 다르게, 카뉴테이루는 아예 월드컵에 소집조차 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그의 무절제한 사생활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프로답지 못한 자기 관리 능력이었다. 

 

 

자, 세 선수를 이제 직접 비교해보자.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운 스타일이었으나 전술적인 이유로 셋 중 가장 중용된 자갈루, 소속팀에서는 펠레에게 밀려 2인자 신세였고 대표팀에서는 전술적으로 밀려 백업 신세였지만 스타일은 에이스였던 페페, 가장 주인공에 가까웠지만 여러 이유로 대표팀에서 외면받은 카뉴테이루. 어느 선수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겠는가? 

 

보통 일반적인 대중들은 높은 인지도 덕분에 자갈루를 높게 평가하지만, 축구 마니아들은 페페를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경우가 많았고, 나 역시 페페가 앞선다는 주장이 가장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페페가 산투스에서 첫번째 옵션이 되지 못한 것은 펠레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현상이었고, 대표팀 주전 경쟁에서 밀린 것은 전술적인 이유였기에 상당히 참작할 수 있다. 에이스로 활약하기에 충분한 기량과 경기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자명하고, 실제로 직접 수많은 득점을 기록하며 펠레와 함께 산투스를 정상으로 이끌었다는 확실한 성과가 존재한다. 

 

아쉽게도 가장 뒤처지는 경우가 많은건 카뉴테이루이다. 상 파울루 역시 꽤 좋은 전력을 갖춘 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뉴테이루가 이끄는 체제에서는 그리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진 못했다. 또한 본인의 사생활 문제로 인해 스스로 커리어를 망친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자갈루는 팀에서 상위 옵션이 되어 캐리하는 부분에서는 열세였지만, 특수한 역할을 매우 잘 소화해내며 클럽과 국가대표팀 모두에서 좋은 성과를 내었고 그 특수한 역할이 갖는 역사적인 상징성 덕분에 페페와 엎치락뒤치락하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제 이 윙어라는 포지션이 얼마나 복잡한지 감이 오는가? 놀라운 사실은 윙어는 이러한 평가의 맥락에서 비교적 단순한 편에 속하는 포지션이라는 것이다. 즉, 당신들은 윙어의 복잡함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더 고급스러운 시각으로 복잡한 축구 역사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윙어라는 포지션은 그것을 위해 사용된 도구이다. 

 

여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저 브라질 삼두마차는 윙어라는 포지션에서의 역할론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훌륭한 사례다. 저 셋 중 누가 제일인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축구가 발전함에 따라 확장된 윙어의 다양한 역할을 아주 잘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자갈루가 보여준 독창적인 스타일이다. 더 이전에는 루스타우가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 당시에는 자갈루가 보여준 이타적이면서 중앙지향적인 스타일은 그 자체로 축구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드디어 본격적으로 '수비형 윙어'라고 불릴만한 독특한 선수가 등장한다. 바로 196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활약하였고 '곤살리토(Gonzalito)'라는 별명으로 불린 알베르토 마리오 곤살레스(Alberto Mario González)이다. 

 

곤살리토

 

곤살리토는 레프트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며 보카 주니어스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큰 기여를 했다. 미드필더와 공격수 사이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며 매끄러운 공격 전개를 도왔고, 수비 시에는 끈질긴 압박으로 팀이 공 소유권을 다시 되찾도록 했다. 강한 조직력을 장점으로 내세웠던 당시의 보카 주니어스에서, 이러한 곤살리토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이었다. 또한 축구사의 관점에서도 윙어의 역할에 수비가 추가되는 시초, 기념비적인 인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의 신장은 179cm로 윙어 치고는 다소 컸는데, 왕성한 활동량과 수비 가담을 위해서는 신체적인 강점이 필요했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이점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대에, 수비형 윙어의 대명사와도 같은 선수가 유럽에 있지 않았는가? 바로 그란데 인테르(La Grande Inter)의 수비형 윙어, 자이르 다 코스타(Jair da Costa)이다. 브라질 태생이지만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원하는 기회를 받지 못하여 유럽 무대에 진출한 자이르는 브라질 축구의 높은 기술을 선보이는 공격적인 윙어였다. 빠르고 기술적이며 정교한 볼 컨트롤과 페인트를 구사했다. 그러나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감독은 그에게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자이르 다 코스타

 

그의 인테르 시절을 대표하는 전술인 카테나치오(Catenaccio)에는 라이트백 포지션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라이트윙이 수비 시에는 라이트백의 위치까지 내려와서 수비에 참여해야했는데, 이를 토르난테(Tornante)라고 한다. 에레라는 그 토르난테 롤에 자이르를 기용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자이르는 공격적인 장점은 그대로 선보이면서 수비적으로도 재능을 만개하여 공수 양면에 걸쳐서 활발하게 팀을 지원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모아보면, 윙어는 측면의 공격수라는 단순한 정의에서 출발하여 공격진의 분업화와 함께 지원의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하게 되었고, 단순한 업무에서 점차 다재다능함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향권이 측면에 한정되지 않고 중앙을 포함하는 넓은 영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심지어는 수비 가담이라는 책임도 부여받았다. 여기까지가 대략 1960년대까지 일어난 발전의 역사이다. 

 

그 이후는 대략 여러분들이 아는 흐름이다. 이미 확립된 역할들의 스펙트럼 안에서, 팀의 전술에 맞게 윙어들이 적절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4-4-2 포메이션의 유행과 함께 측면에서 많은 활동량과 크로스로 공격을 지원하는 플레이가 클래식한 윙어의 스타일로 자리잡았고, 이후에는 4-3-3 포메이션 등이 주류가 되면서 측면에서 중앙으로 들어오며 직접 득점을 노리는 윙 포워드가 대세가 되기도 했다. 팀에서의 비중도 팀을 이끄는 에이스부터 보이지 않는 언성 히어로까지 다양했다. 이것이 가장 다양하고 매력적인 포지션인 윙어를 만든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