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잡담/경기 관전 후기

2023-24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vs 도르트문트 후기

Fio de Esperança 2024. 4. 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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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가장한 선수 찬양글이다. 

 

바쁜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짧고 간략하게 쓰는 점 양해 바란다. 사실 이번 경기는 후기를 스킵하려고 했으나, 한 선수의 활약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완벽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 선수는 바로 앙투안 그리즈만이다.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칭찬은 무궁무진하지만,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본다. 

 

 

 

경기의 거의 모든 플레이에 관여하는 경이로운 영향력 

 

스타팅 포지션 상으로는 투톱의 한 자리로 나선 그리즈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의 포지션을 정의할 수 없다. 그는 경기장 전역을 마치 자신의 집 안방처럼 자유롭게 누비며 많은 활동량과 효율적인 동선으로 팀이 필요로 하는 모든 때와 장소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해야할 플레이를 정확하게 수행한다. 그의 경기를 집중해서 본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경기의 흐름 상, '지금 여기에 누가 나타나서 이걸 해줘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법처럼 그리즈만이 나타나서 그렇게 경기를 풀어간다. 또한 방송 화면으로 보는 시청자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패스를 전개하는 놀라운 시야까지 겸비하고 있다. 

 

단순히 많이 뛰기만 해서는 절대 그리즈만처럼 할 수 없다. 양과 질을 모두 갖추어야만 한다. 대표적으로 그리즈만의 압박은 다른 선수들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 그리즈만은 한 번의 압박 시도로 두 번의 압박을 할 수 있다. 이번 경기에서도 그런 장면이 여러 번 나왔다. 상대방의 후방 빌드업 과정에서, 측면에서 공을 잡은 선수를 압박하러 뛰어가면 그 선수는 몸을 돌려 중앙 수비수에게 백패스를 한다. 그리즈만은 그 플레이를 미리 예상하고, 상대가 백패스를 하기 전에 백패스를 받을 선수에게로 뛰어간다. 그 선수가 백패스를 받는 순간 그리즈만 역시 그를 압박하고, 공을 받자마자 급하게 다른 곳으로 패스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일반적인 선수라면 중앙에 위치한 상태에서 측면의 상대방에게로 달려들고 그대로 그를 지나치거나, 그가 중앙으로 백패스를 하는 것을 보고 급하게 방향을 돌려 2차 압박을 시도한다. 그러나 너무 늦다. 백패스를 받은 선수에게 접근할 때 쯤이면 그 선수는 이미 여유롭게 전방을 둘러보고 빌드업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즈만은 다르다. 빠른 판단과 상대를 빙 돌아서 가지 않고 짧게 커브를 도는 효율적인 동선 덕분에 백패스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두 선수를 모두 압박할 수 있다. 자잘한 플레이 하나하나, 완벽하게 최적화가 되어있다. 이러한 플레이는 유심히 지켜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발견한다면 저절로 탄성이 새어나온다. 그리즈만은 그것을 경기 내내 자주 보여준다. 남들이 90분을 뛰는 동안 그는 90분을 180분처럼 쓸 수 있다. 그리즈만은 이런 선수다.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플레이메이킹 

 

전세계에 훌륭한 플레이메이커라고 자부할 수 있는 선수는 많지만, 그리즈만은 유일하다. 높은 수준에 있을 뿐더러, 그 스타일도 유니크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다른 선수들보다 많은 상황에 관여하지만 그가 공을 소유하는 시간은 특별히 길지 않다. 오히려 절대 공을 길게 소유하지 않는다. 최대한 템포를 살려서 간결하게 동료에게 소유권을 넘겨준다. 빠르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전진하는 링크-업 플레이에서 그리즈만의 실력에 범접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신들린 패스 앤 무브와 팀 플레이 설계를 활용하여 순식간에 공격 찬스를 만들어낸다. 개개인의 기량이 다른 강팀들에 비해 뛰어나지 않은 아틀레티코의 공격진도 그리즈만의 지휘 하에서는 위력적인 플레이를 자주 보여줄 수 있다. 그는 팀의 퀄리티를 끌어올릴 줄 아는 선수다. 

 

어떻게 그것을 그렇게 잘 해낼 수 있을까? 크게 두 가지 장점을 언급할 수 있다. 첫째는 환상적인 볼 터치이다. 터치는 가장 기본적인 기본기이면서 가장 화려한 개인기가 될 수 있다. 그리즈만은 정교하고 우아한 터치를 통해 자신이 공을 소유하는 첫 순간부터 상대보다 유리한 상황에 올라선다. 그 직후에 이어지는 플레이들 역시 터치 하나로 간단하게 상대를 제치거나 상대의 빈틈을 패스로 정확하게 찌르는 등 효율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예 이 모든 과정을 원터치로 해내기도 한다. 아무리 터치가 훌륭해도 인풋과 아웃풋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그렇게 줄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의 둘째 장점, 독보적인 축구 지능과 판단력이다. 그는 공 소유권을 얻기 전부터 마치 그 뒤의 몇 수를 내다보는 것 같다. 팀의 플레이메이킹을 전담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은 최적의 플레이를 시도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 본인이 공을 오래 소유하는 것을 선호하고, 유려한 탈압박과 볼 키핑을 통해 그것을 실행한다. 그들이 공을 짧게 가지고 곧바로 패스를 하는 경우는 대부분 상대의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서다. 즉 그리 영양가가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리즈만은 짧은 순간에 자신이 할 플레이를 설계하기 때문에 한두번의 터치만으로 최적의 플레이가 나온다. 평범한 인풋에서 효과적인 아웃풋을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시간이 매우 짧다. 효율적인 플레이의 정점에 올라섰다. 

 

이것에 능통한 다른 선수의 예시로 케빈 더 브라위너(KDB)를 들 수 있다. 두 선수 모두 순식간에 최적의 플레이를 해낼 수 있는 현존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들이지만 그 툴과 스타일은 꽤 다르다. KDB는 더 파워풀하고 직접적인 찬스메이킹에 있어서 독보적인 능력을 자랑한다. 그리즈만은 툴이 더 세밀하며 축구의 더 다양한 영역에 관여하는만큼 더 다양한 것을 보여줄 수 있다. 현재의 그리즈만은 후방에서부터 기점이 되는 경우가 많기에, 한 번에 득점 찬스를 생산할 수 있는 기회가 KDB만큼 많지 않다. 대신 짧은 패스들로 빠르게 경기를 조율하고 링크-업 플레이로 속공을 이끄는 것에서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 

 

또한 그들의 스타일은 각자의 팀에서 엄청난 보탬이 되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는 어느 팀을 만나도 경기를 완벽히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팀이며, KDB의 동료 공격수들 역시 득점 찬스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따라서 이미 경기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 KDB의 발끝이 만들어내는 패스 한 방은 득점 찬스로 직결된다. 반면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꽤 독특한 팀이다. 공격 시에는 상대를 격렬하게 몰아붙이는 것 같지만 수비 시에는 다른 강팀들과 다르다. 높은 에너지 레벨을 경기 내내 유지하지 못하여 전방에서 적극적으로 압박하지 않고 라인을 내려서 수비할 때가 많다. 그래서 상대에게 점유율을 상당히 내주고, 공을 탈취하고 공격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큰 찬스를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평범한 선수비 후역습을 구사하는 팀들보다 위력적인 찬스를 훨씬 많이 생산한다. 그런 괴상한 축구가 가능한 것은 그리즈만의 존재 덕분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평범한 인풋에서 순식간에 효과적인 아웃풋을 만드는 선수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단순한 개성이 아니다. 이 팀에게는 그것이 생명줄이다. 그가 없으면 아틀레티코는 이전처럼 다이렉트한 역습만을 무기로 삼아야했을 것이고 역습이 실패한 이후에는 상대의 수비벽을 허물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이 나왔을 것이다. 그가 있기에 역습의 효율성도 높아지고 역습 이후에도 빠른 템포로 패스를 돌리며 빈틈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경기에서도 경기 초반에는 전방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걸어 도르트문트를 고전하게 했고 선제골까지 득점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도르트문트도 페이스를 회복했고 아틀레티코도 에너지 레벨을 서서히 잃어가며 점유율을 내주었다. 하마터면 실패한 경기력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낮은 압박 라인과 적은 점유율로도 꽤 괜찮은 공격 기회들을 얻었다. 그 과정에는 모두 그리즈만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업 템포의 공격 전개를 지향하는 팀에서 그리즈만보다 치명적인 옵션은 축구사를 통틀어도 거의 찾기 힘들 정도로 그리즈만의 영향력과 수준은 매우 높다. 그리즈만을 두고 '플라티니와 지단을 합친 선수'라고 평가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업 템포의 플레이메이킹 성향과 후방에서부터 경기를 조율하고 빠르게 전방으로 침투하는 움직임은 플라티니와 닮았고 완벽한 터치를 기반으로 한 예술적인 플레이는 지단을 닮았다. 지단이 가진 툴로 플라티니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선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수비는 그들보다 훨씬 잘한다. 

 

 

경기의 백미이자 화룡점정, 2번째 골 창조 

 

특히 아틀레티코의 2번째 득점은 그리즈만의 미친 설계가 만들어냈다. 지극히 평범한 스로인 상황에서, 그리즈만은 갑자기 상대의 수비라인 뒤로 뛰어들어갔다. 그 곳까지는 스로인이 닿지 않을뿐더러 만약 그 곳에서 공을 잡는다 한들 영락없는 오프사이드에 걸린다. 그리즈만이 위치를 못 잡는 선수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는 그렇게 하여 상대를 함정에 빠트렸다. 그리즈만을 마크하지 않아도 된 상대의 중앙 수비진은 여유가 생겼다. 그들은 별다른 공중볼 경합 없이 손쉽게 스로인 볼을 따냈다. 그러나 세컨볼을 아틀레티코 선수가 잡았고, 그 타이밍에 딱 맞춰 그리즈만은 온사이드 위치로 복귀했다. 상대의 배후에 머무르며 시야를 완전히 벗어나있었기에 상대 수비수들은 그 움직임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으며, 그리즈만은 패스를 받자마자 앞으로 뛰어가며 큰 찬스를 얻었다. 반대쪽 수비수가 그리즈만을 막으러 왔지만 그리즈만은 공을 띄워서 수비수를 제치는 재치있는 패스로 건너편의 리누에게 완벽한 슈팅 찬스를 만들어주었고 그대로 골이 되었다. 

 

 

동영상 출처: 에펨코리아 "공항도둑"님

 

 

동영상 출처: 에펨코리아 "공항도둑"님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오프사이드 위치로 들어간 것은 누가 보아도 고의적이다. 그리즈만이 공을 잡을 때까지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으며 그의 움직임에 현재 세계 최고의 센터백 중 하나인 마츠 후멜스조차 완전히 농락당했다. 스로인을 대비하던 수비수들은 자연스럽게 사이드라인을 보고 플레이하게 되며 헤더를 따낸 이후에도 그들의 시선은 공이 위치한 방면을 따라가게 된다. 중앙에 위치한 그리즈만이 온사이드 위치에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리즈만을 등지고 있었다. 사각지대를 활용해 완벽하게 설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수비수의 데드볼 수비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도가 없다면 상상하지 못할 창의적인 작전이기에, 그리즈만은 이미 수비수의 플레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축구라는 종목에 대한 깊은 이해도와 창의성, 임기응변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내가 그동안 봐온 그리즈만의 슈퍼 플레이 중 가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이러한 천재적인 플레이 외에도 경기 내내 보여주는 극한에 달한 효율성과 신속한 판단력, 공수만능과 유틸리티까지. 그는 아마도 역사상 모든 축구선수 중 가장 지능적인 선수일 것이다. 그리고 유일무이한 독특함을 보여준다. 애초에 지금의 그와 유사한 스타일의 선수를 찾으려면 시대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 50년 전의 요한 크라위프, 70년 전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예시로 들어야한다. 그들조차도 그리즈만과는 구체적인 스타일이 다르다. 

 

축구에 통달하여 현재 전세계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는 그리즈만이고 최고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모든 이들을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리즈만이 누구보다 고급스러운 플레이를 한다고 한들, 일반 대중들은 그것을 쉽게 보지 못한다. 그리고 관중들은 단순한 아이솔레이션으로 변수를 만들어내는 것에 더욱 환호한다. 또한 그는 우승을 하기 쉬운 팀에서 뛰고 있지 않기에 그와 비슷한 수준의 기량을 보여준 다른 선수들에 비해 가시적인 성과가 적고 그의 활약을 칭찬해줄 팬덤도 작다. 그래서 그의 가치가 심각하게 저평가당하는 것이다. 

 

불합리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승 트로피는 그리즈만이 역사적인 위상을 올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선수에 대한 평가는 순수한 실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시적인 족적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법이다. 한계를 극복해내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다양한 한계를 극복하고 모두가 볼 수 있는 결과물을 낸다는 점에서는 그리즈만보다 뛰어났던 선수들이 있다. 물론 미시적으로는 운과 같은 기량 외적인 요소들이 많이 작용하기에 여전히 억울한 면이 많지만, 그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업적을 세우는 것이 제일 깔끔하다. 

 

그래서 그가 아틀레티코를 UCL 정상으로 이끄는 역사적인 캐리를 보여주고, 그동안 그의 진가를 보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나는 그를 믿는다. 지금의 그리즈만이라면 누구든 두렵지 않다. 그러나 무적의 강자라도 내부의 적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있듯이, 아틀레티코도 그리즈만 외의 나머지 선수들이 더 분발해줄 필요가 있다. 아틀레티코가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4경기가 남았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구단 역사상 최초의 빅이어를 들어올리고, 그리즈만에게도 합당한 명예가 주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