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k 10
Tony La Russa
토니 라 루사
종목: 야구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44.10.04.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9~1986)
오클랜드 애슬래틱스 (1986~1995)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96~2011)
시카고 화이트삭스 (2021~2022)
주요 커리어
월드 시리즈 챔피언: 1989, 2006, 2011
MLB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감독: 1983, 1988, 1992
MLB 내셔널 리그 올해의 감독: 2002
야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기록 측면에서는 1팀에서만 무려 50년간 감독직을 역임하며 MLB 역대 최다 승 기록을 세운 코니 맥에게 밀리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과 전술적 영향력으로는 단연 탑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약체로 꼽히던 팀인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하위권에 머물던 팀을 ALCS에 진출시키는 탁월한 지도력을 뽐냈다. 물론 화이트삭스의 상위권 도약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무명의 지도자였던 그가 전도유망한 지도자로 평가받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의 다음 팀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길 원하는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였다. 리키 헨더슨, 마크 맥과이어, 호세 칸세코 등의 강력한 라인업으로 우승에 도전하는 애슬래틱스는 우승까지는 뭔가 조금 모자란 상태였다. 여기서 라 루사는 야구를 바꾸어 놓는다.
에이징 커브에 시달리던 선발 투수 데니스 에커슬리에게 '이기는 경기 9회'에만 나설 것을 지시했고 이는 현대 야구 최초의 1이닝 전담 마무리 투수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 외에도 그는 데이터를 중시하며 5선발 로테이션, 원 포인트 릴리프, 플래툰 시스템 등의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하였는데 이것들이 모두 성공을 거두며 팀을 1989 월드 시리즈 챔피언, 3연속 월드 시리즈 진출로 이끌었다. 이러한 그의 개혁들은 단순한 일회성 성공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팀들의 롤모델이 되었으며 특히 그의 투수 운용 시스템은 현대 야구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흔히 야구는 구기종목 중 가장 감독의 영향력이 적다고 하지만, 그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야구에서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전술적 역량과 영향력을 증명해냈다.
이후 애슬래틱스는 팀의 사이클이 끝나며 강자의 위치에서 내려오게 되고, 라 루사 역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그의 전설은 이어졌다. 애슬래틱스에서의 기발한 실험과 개혁은 없었지만, 알버트 푸홀스, 야디어 몰리나와 같은 레전드급 선수들을 데리고 2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추가했다. 2011년, 그는 자신의 통산 3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과 함께 정상에서 은퇴했다.
Rank 9
Ernst Happel
에른스트 하펠
종목: 축구
국적: 오스트리아
생년월일: 1925.11.29.
ADO 덴 하흐 (1962~1969)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69~1973)
세비야 FC (1973~1974)
클뤼프 브뤼허 KV (1974~1978)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77~1978)
KRC 하럴버커 (1979)
스탕다르 리에주 (1979~1981)
함부르크 SV (1981~1987)
FC 티롤 인스브루크 (1987~1991)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1992)
주요 커리어
에레디비시: 1970-71
벨기에 퍼스트 디비전 A: 1975-76, 1976-77, 1977-78
분데스리가: 1981-82, 1982-83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1988-89, 1989-90
KNVB 베이커: 1967-68
벨기에 컵: 1976-77, 1980-81
DFB-포칼: 1986-87
ÖFB 컵: 1988-89
유로피언 컵: 1969-70, 1982-83
인터콘티넨탈 컵: 1970
FIFA 월드컵 준우승: 1978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 1978, 1983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82-83
축구 역사상 최초로 4개국의 리그에서 우승한 감독이자 축구사 최초로 2개 클럽에서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한 감독으로, 축구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감독이자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이다. 여러 국가 무대를 돌며 우승을 쓸어담는다는 우승 청부사의 이미지를 잘 정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처음으로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클럽은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이다. 그곳에서 라이벌 리뉘스 미헬스와 치열하게 경쟁하며 현대 축구의 근간이 되는 토탈풋볼을 개발하고 발전시켰으며 4-3-3 포메이션을 창시하여 토탈풋볼을 성공적으로 구현하는 업적을 세웠다. 첫 유로피언 컵 우승도 이 때 달성했다.
이후 벨기에의 클뤼프 브뤼허에서 안더레흐트와 치열한 라이벌리를 구축했으며 리그 3연패를 달성했다. 적어도 하펠이 있는 동안에는 브뤼허가 더 우세했다.
그리고 잠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1978 FIFA 월드컵 준우승을 이뤄냈다. 팀의 상징 요한 크라위프가 개인사로 인해 대회에 불참하는 최악의 악재 속에서도 로프 렌센브링크, 요니 레프, 아리 한 등으로 크라위프의 공백을 적절히 메웠고 여러 세부전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결승에 진출하였는데 이는 감히 감독의 원맨쇼로 칭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역사를 계속 써내려갔다. 2시즌 연속 바이에른 뮌헨을 제치고 분데스리가를 제패했으며, 더 강한 전력을 보유했던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를 꺾고 유로피언 컵 우승까지 이뤄냈다. 거장이 마침내 신화가 되는 순간이었다.
Rank 8
Phil Jackson
필 잭슨
종목: 농구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45.09.17.
시카고 불스 (1989~1998)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9~2004, 2005~2011)
주요 커리어
NBA 챔피언: 1991~1993, 1996~1998, 2000~2002, 2009~2010
NBA 올해의 감독: 1995-96
통산 11번의 우승과 3번의 쓰리핏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농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이다. 전술보다는 리더십과 카리스마에 기반한 스쿼드 매니징으로 정상의 자리를 지킨 스타일의 명장이며, 특히 슈퍼스타를 조련하여 팀 플레이에 녹여내는 부분에 있어서는 스포츠 역사상 최고로 평가받는다.
역사상 최고의 선수 마이클 조던이 우승에 굶주려있던 시절 시카고 불스에 부임하여 그를 지도하며 2번의 쓰리핏을 달성한 불스 왕조를 건설하였으며, 불스를 떠난 이후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를 필두로 한 강력한 우승후보 LA 레이커스에 부임하여 또 한 번의 쓰리핏을 달성했다.
물론 그에게는 소위 말하는 '선수빨'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의 우승에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등의 엄청난 네임밸류의 슈퍼스타들이 늘 함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선수의 덕을 봐도 그렇지, 11번의 우승은 흠집 내기 어려운 업적이다. 또한 그에게는 위대한 관리자이지 위대한 전술가가 아니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대학 농구에서 발전한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프로 레벨에 적용하여 성공을 거둔 바가 있다. 즉 이미 존재하는 전술을 강력한 스쿼드에 접목시켜 성과를 내는 능력은 뛰어났다는 것이다.
여튼 3번의 쓰리핏을 달성한 잭슨은 잠시 감독직을 내려놓은 시기도 있었지만, 샤크가 떠난 레이커스에 다시 복귀하여 코비, 파우 가솔과 함께 2번의 우승을 더 추가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보였다.
Rank 7
Red Auerback
레드 아워백
종목: 농구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17.09.20.
워싱턴 캐피톨스 (1946~1949)
트라이시티 블랙호크스 (1949~1950)
보스턴 셀틱스 (1950~1966)
주요 커리어
NBA 챔피언: 1957, 1959~1966
NBA 올해의 감독: 1964-65
통산 9번의 우승과 북미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장기간 연속 우승 기록인 8-peat을 이끈 농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이다. 흔히 선수를 보는 안목에서는 NBA 역대 최고라고 평가받으며 이를 바탕으로 감독, 단장, 사장으로서 보스턴 셀틱스의 왕조를 건설하고, 또 유지했다.
우승이 없던 구단인 보스턴 셀틱스에 감독 겸 단장으로 부임하며 전권을 부여받았으며, 부임하자마자 밥 쿠지를 드래프트하며 훌륭한 안목을 보여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꾸준히 전력을 강화하다가 1956년, 그의 최고의 작품인 빌 러셀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본격적으로 우승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1957년, 셀틱스는 아워백의 작품인 쿠지와 러셀을 핵심으로 하여 첫 우승을 차지하는데에 성공했다. 그 후 1959년부터 1966년까지, 무려 8시즌 연속으로 NBA를 우승하며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북미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장기간 연속 우승 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성공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워백이 자신의 손으로 셀틱스 다이너스티를 건설했다는 것에는 아무도 이견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왕조의 주축인 밥 쿠지, 빌 러셀, 존 하블리첵 모두 아워백이 데려온 유망주들이었기 때문이다. (러셀은 드래프트 당시 타팀에 지명되었지만 곧바로 셀틱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전술적으로도, 그는 빌 러셀의 위대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농구에서의 팀 수비라는 개념을 제대로 정립한 인물이다. 그리고 식스 맨의 창시자라는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식스 맨은 주로 백업 자원들이 출장하는 벤치 타임에 주전급 기량을 가진 선수를 투입하여 높은 효율을 낸다는 목적, 중요한 승부처에서 개인 기량으로 팀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목적 등을 가지는데, 아워백은 팀의 에이스 중 하나였던 존 하블리첵을 이러한 식스 맨으로 활용하여 상대 주전들의 체력이 떨어진 타이밍에 코트를 휘젓고 다니도록 했다.
또한 그는 당시 미국 농구계, 아니 스포츠계에 만연하던 인종차별을 깨부순 선구자이기도 하다. 흑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오늘날의 NBA와 정반대로, 당시 NBA는 흑인을 차별하던 리그였는데 아워백은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고 오직 재능으로만 선수를 선발하여 빌 러셀 등의 흑인 선수들에게도 NBA 입성의 문을 열어주고 성장시켰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위대한 업적이지만, 스포츠적으로만 보아도 타 팀들보다 더 넓은 인재풀을 활용하여 유리함을 점했다는 의미가 크다.
제자 빌 러셀에게 감독직을 물려준 이후에도 프런트로서 셀틱스에 계속 헌신한 아워백은, 러셀과 더불어 프랜차이즈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래리 버드를 드래프트에서 지명하는 등의 위대한 족적을 남기며 셀틱스 역사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기여했다.
Rank 6
Vince Lombardi
빈스 롬바르디
종목: 미식축구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13.06.11.
그린베이 패커스 (1959~1967)
워싱턴 레드스킨스 (1969)
주요 커리어
NFL 챔피언: 1961~1962, 1965~1967
슈퍼볼 챔피언: I, II
NFL 올해의 감독: 1959
스몰마켓의 별 볼 일 없는 팀을 순식간에 리그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시킨 불세출의 명장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현재 슈퍼볼 우승 트로피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승률이 채 10%도 되지 않았던 초라한 약체 팀에 부임한 초보 감독. 선수들에게 열정을 불어넣으며 기본기를 중시하는 고강도의 훈련으로 기량을 상승시켰고 '패커스 스윕'이라 불리는 러닝 공격 전술을 개발하여 부임 첫 시즌에 팀을 3위로 이끌었다.
롬바르디가 얼마나 팀을 바꿔놓았기에? 대표적으로 주전 쿼터백 바트 스타는 한때 역사상 최고의 쿼터백으로도 거론될만큼 실력과 위상이 상승했으며, 1962시즌의 로스터 중 무려 11명의 선수가 훗날 NFL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만큼 패커스는 강력한 팀으로 변모했다.
그들의 상승세는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NFL 챔피언의 왕좌에 올랐다. 그것도 5번이나. 그리고 이 시기에는 NFL과 AFL 양대리그의 통합 챔피언십인 슈퍼볼이 1966-67시즌부터 출범했는데, 롬바르디의 패커스는 초대 슈퍼볼과 2대 슈퍼볼을 연달아 제패하며 이견 없는 왕조를 만들었다.
그 이후에는 유의미한 커리어를 쌓지 못했고 건강 문제로 다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슈퍼볼 우승 트로피인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로 영원히 역사에 남아있다.
Rank 5
Sir Alex Ferguson
알렉스 퍼거슨 경
종목: 축구
국적: 스코틀랜드
생년월일: 1941.12.31.
이스트 스털링셔 FC (1974)
세인트 미렌 FC (1974~1978)
애버딘 FC (1978~1986)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985~198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86~2013)
주요 커리어
스코티시 프리미어 디비전: 1979-80, 1983-84, 1984-85
프리미어리그: 1992-93, 1993-94, 1995-96, 1996-97, 1998-99, 1999-00, 2000-01, 2002-03, 2006-07, 2007-08, 2008-09, 2010-11, 2012-13
스코티시 컵: 1981-82, 1982-83, 1983-84, 1985-86
FA 컵: 1989-90, 1993-94, 1995-96, 1998-99, 2003-04
UEFA 챔피언스리그: 1998-99, 2007-08
인터콘티넨탈 컵: 1999
FIFA 클럽 월드컵: 2008
유로피언 컵 위너스 컵: 1982-83, 1990-91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감독: 1993-94, 1995-96, 1996-97, 1998-99, 1999-00, 2002-03, 2006-07, 2007-08, 2008-09, 2010-11, 2012-13
UEFA 올해의 감독: 1998-99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93, 1999, 2007, 2008
IFFHS 세계 최고의 클럽 감독: 1999, 2008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 2008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1998-99, 2007-08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우승 감독이자 축구사 최다 우승 감독이며 별다른 실패 없이 축구사에서 가장 오래 롱런을 보여준 감독으로,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이며 명장의 대명사로 통하는 인물이다. 특히 한 팀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위상을 유지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압도적인 역대 최강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스코틀랜드 내에서 촉망받는 젊은 감독이었던 퍼거슨은 셀틱과 레인저스라는 양강의 지배 구도가 굳건한 스코틀랜드에서 애버딘을 이끌고 적은 예산으로 그 양강을 깨부수며 3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심지어 유럽 대항전 우승까지 차지하며 전 유럽이 주목하는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에서 신화를 썼다. 그가 지휘하는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20년 동안 무려 13번을 우승하며 잉글랜드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2번 우승했다. 특히 1998-99시즌에는 트레블을 달성했는데, 이는 헤이젤 참사로 인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던 잉글랜드 축구계의 위상을 다시 정상에 근접하게 끌어올린 대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럼 퍼거슨은 어떻게 맨유를 왕조로 만들었는가? 그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선수를 보는 안목, 뛰어난 선수단 관리, 적절한 전술 활용 능력이다.
그는 소위 '퍼기의 아이들'로 불리는 유스 출신 선수들을 팀의 주축으로 만들었다. 라이언 긱스,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니키 버트 등을 지칭하는 이 단어는 당연히 퍼거슨 최고의 작품이다. 또한 로이 킨, 리오 퍼디난드,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 팀에 필요한 유망한 선수들을 영입하여 최고 수준으로 성장시키는 것에도 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강한 스쿼드를 하나의 팀으로 묶는 것도 당연히 중요한 과제다. 퍼거슨은 선수단 내 규율을 중시하였고 훌륭한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그 규율 아래 하나로 묶는 것에 성공했다. '헤어드라이어'라고 불리는 그의 강경한 라커룸 대화는 유명하다. 또한 팀 케미스트리를 해치는 선수가 있으면 아무리 슈퍼스타일지라도 과감히 내치고는 했다. 그만큼 선수단 장악에 능했던 감독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약점으로 평가되곤 하는 전술적 역량도 나름대로 뛰어났다. 확실히 퍼거슨은 시대를 대표하고 패러다임을 바꿔놓는 전술을 개발하거나 상대에 따른 맞춤 전술로 상대 감독과의 지략 싸움에서 승리하는 이미지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당대 프리미어리그의 트렌드였던 4-4-2 포메이션을 가장 잘 활용하는 감독 중 하나였고,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추어 인버티드 윙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베스트 일레븐에 공백이 생기면 로테이션을 통해 해결하는 특유의 용병술에도 능했다.
오랫동안 리그 우승이 없었던 맨유를 최강의 팀으로 만들었고, 그가 떠난 뒤로 맨유는 거대한 예산을 지출하면서도 오랜 암흑기를 겪고 있다. 그가 얼마나 맨유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Rank 4
Scotty Bowman
스코티 바우만
종목: 아이스하키
국적: 캐나다
생년월일: 1933.09.18.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1967~1971)
카나디앵 드 몽레알 (1971~1979)
버팔로 세이버스 (1979~1987)
피츠버그 펭귄스 (1991~1993)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1993~2002)
주요 커리어
스탠리 컵 챔피언: 1973, 1976~1979, 1992, 1997~1998, 2002
아이스하키 역사상 최고의 감독. NHL 역사상 가장 많은 9번의 스탠리 컵을 들어올린 명장이자 3개의 왕조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첫 번째 영광은 리그 최고의 멍문인 카나디앵 드 몽레알에서 시작되었다. 1973년에 처음으로 스탠리 컵에서 우승했고, 이후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연속으로 스탠리 컵을 제패하며 왕조를 이끌었다. 흔히 NHL 역사상 최고의 단장으로 뽑히는 명단장 샘 폴록과 함께 기 라플뢰르, 스티브 셔트, 래리 로빈슨, 켄 드라이든 등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선수단을 구축한 결과였다.
두 번째 영광은 마리오 르미외와 함께 신흥강자로 올라선 피츠버그 펭귄스에서였다. 단 두 시즌만을 보냈지만 임팩트는 햅스 시절 못지 않게 강렬했다. 첫 시즌에 정규 시즌 승점 100점과 스탠리 컵 우승을 달성했고 두 번째 시즌에는 비록 스탠리 컵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정규 시즌 승점 119점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세 번째 영광은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에서였다. 스티브 아이저먼, 세르게이 표도로프, 니클라스 리드스트룀 등 강력한 선수단을 바탕으로, 바우만 감독의 뛰어난 전술적 역량이 빛을 발하며 3번의 스탠리 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전술이 가장 빛났던 시기로 평가받는게 바로 이 레드윙스 시절인데, 당시 동구권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NHL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그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함과 동시에 동구권에서 유행하던 전술을 성공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윙어 한 명이 수비에 크게 가담하는 락 시스템은 동구권 하키에서 유행하던 전술이었다. 동구권 선수들이 팀에 대량으로 유입되자 바우만은 이 락 시스템을 팀의 사정에 맞게 개량하여 활용하기 시작한다. 팀에 수비적인 레프트윙과 센터가 많다는 점을 이용하여, 수비 시에 레프트윙을 완전히 아래 라인으로 내려 좌측면에 수적 우위를 형성하고 센터와 라이트윙이 적극적인 포어체킹으로 상대의 공격을 그 좌측면으로 몰아넣는 방식의 수비 전술을 개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레프트 윙 락 시스템이다.
이렇듯 훌륭한 리더십과 이적시장 정책, 전술적 역량을 두루 갖춘 바우만은 하키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Rank 3
Gregg Popovich
그렉 포포비치
종목: 농구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49.01.28.
샌안토니오 스퍼스 (1996~)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2018~2021)
주요 커리어
NBA 챔피언: 1999, 2003, 2005, 2007, 2014
NBA 올해의 감독: 2002-03, 2011-12, 2013-14
한 팀에서만 30년 가까이 장기집권하며 꾸준하게 높은 성적을 유지한 농구계의 알렉스 퍼거슨이며 NBA 역사상 최다 승을 기록한 농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감독, 단장, 사장으로서 구단 운영의 전권을 쥐고 무려 30년 가까이 팀을 이끌고 있으며 파이널 우승이 없던 팀에 무려 5번의 우승을 선물했다. 엄격한 샐러리캡이라는 제한이 존재하는 리그에서 스몰마켓 팀을 이끌고 이렇게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한 케이스는 드물다.
감독직 초반에는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도리어 이걸 기회로 탱킹에 성공하며 자신의 페르소나가 될 팀 던컨을 드래프트했다. 던컨의 합류로 데이비드 로빈슨 - 팀 던컨이라는 최강의 빅맨 트윈 타워를 결성하였고 단단한 수비와 빅맨 듀오의 파괴력을 바탕으로 2번의 파이널 우승을 이뤄냈다.
'제독' 로빈슨의 은퇴 이후에는 토니 파커와 마누 지노빌리라는 걸출한 가드들을 발굴하여 던컨과 함께 빅3를 조합, 3번의 파이널 우승을 더 추가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변화를 단행하는 깨어있는 감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수비 위주의 플레이로 비판받기도 했던 팀에서 프린스턴 모션 오펜스 기반의 공격적인 팀으로 스타일을 완전히 탈바꿈했고, 주전 위주 운영을 포기하고 로스터를 최대한 쥐어짜내 풀 로테이션을 운영하며 주전들의 출장시간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변모하였다.
빅3 해체 이후에는 우승이 없으나 라마커스 알드리지, 카와이 레너드라는 새로운 에이스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높은 성적을 유지했다. 물론 아무리 포포비치라도 언젠가는 흐름이 끊기기 마련이고 실제로 최근 스퍼스는 하위권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던컨을 지명했던 그 때처럼, 다시 한 번 탱킹에 성공하며 최고의 유망주 빅터 웸반야마를 지명했고 그를 중심으로 팀을 리빌딩하는 중이다. 그리고 여전히 스퍼스의 감독은 그렉 포포비치이다.
Rank 2
Pep Guardiola
펩 과르디올라
종목: 축구
국적: 스페인
생년월일: 1971.01.18.
FC 바르셀로나 (2008~2012)
FC 바이에른 뮌헨 (2013~2016)
맨체스터 시티 FC (2016~)
주요 커리어
라리가: 2008-09, 2009-10, 2010-11
분데스리가: 2013-14, 2014-15, 2015-16
프리미어리그: 2017-18, 2018-19, 2020-21, 2021-22, 2022-23, 2023-24
코파 델 레이: 2008-09, 2011-12
DFB-포칼: 2013-14, 2015-16
FA 컵: 2018-19, 2022-23
UEFA 챔피언스리그: 2008-09, 2010-11, 2022-23
FIFA 클럽 월드컵: 2009, 2011, 2013, 2023
라리가 최우수 감독: 2008-09, 2009-10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감독: 2017-18, 2018-19, 2020-21, 2022-23, 2023-24
FIFA 올해의 감독: 2011, 2023
UEFA 올해의 감독: 2022-23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2009, 2011, 2023
IFFHS 세계 최고의 클럽 감독: 2009, 2011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 2011
유럽 시즌의 축구 감독: 2008-09
무려 2번의 트레블을 달성하며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새롭게 올라선 인물이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전술가라고 할 수 있는 명장이다.
젊은 나이에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범상치 않은 인물인데, 그 첫 시즌에 곧바로 전관왕을 차지하며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요한 크라위프가 클럽에 정착시켜놓은 토탈풋볼 기반의 게임 철학을 그대로 계승하고 '티키타카'라고 불린 연속적인 숏패스를 통한 점유를 극대화시키며, 구단의 유스 시스템인 라 마시아 출신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도출해낸 결과이다.
리오넬 메시, 차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 카를레스 푸욜, 피케 등의 많은 라 마시아 출신 선수들이 펩의 전술 아래에서 재능을 만개했으며, 이들과 함께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며 축구사 최강의 왕조를 건설하는데에 성공했다.
이후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에서 새로운 도전을 했는데, 기존의 선수단 컬러와 맞지 않는 자신의 철학을 과하게 밀어붙였다는 비판도 있으나 어쨌든 리그 3연패라는 결과를 냈고, 필리프 람과 마누엘 노이어 등 일부 선수들이 펩의 철학에 적응하며 한 단계 더 스텝업하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바이언 시절을 뒤로 하고 신흥 강호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했는데, 초반에는 엄청난 지출과 리그 지배력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실패하여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엘링 홀란의 영입과 함께 스쿼드의 약점으로 지적받던 톱 문제가 해결되자 커리어 통산 두 번째 트레블을 이뤄냈고, 그 과정에서 3-2-4-1 포메이션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극찬을 받았다.
그의 전술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바꾸었지만, 그 기반은 언제나 포지셔널 플레이로 같았다. 포지셔널 플레이가 무엇이냐, 공간을 여러 구역으로 세분화시킨 뒤, 선수들은 스타팅 포지션에 따른 고정된 롤이 아닌 자신이 위치한 구역에 맞는 플레이를 펼치며 이를 통해 수적, 질적, 위치적 우위를 만들어내는 게임 철학이다. 펩의 전술을 단순히 패스와 점유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패스와 점유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답이 포지셔널 플레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 포지셔널 플레이라는 강한 전술적 기반을 바탕으로 맨체스터 시티에서 빠른 템포, 높은 라인, 강한 압박으로 대표되는 프리미어리그의 전술 트렌드를 이끌었으며, 케빈 더 브라위너와 로드리를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로 성장시켰다. 또한 3-2 후방 빌드업 구조를 유행시키며 끊임 없이 전술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바르셀로나의 성공은 일시적이거나 라 마시아 황금세대 덕분이라는 다소 억지에 가까운 의구심까지 완전히 종식시키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존 최고의 감독이자 역사상 최고의 감독 지위에 올라섰다.
Rank 1
Bill Belichick
빌 벨리칙
종목: 미식축구
국적: 미국
생년월일: 1952.04.16.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1991~1996)
뉴욕 제츠 (2000)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2000~2023)
주요 커리어
슈퍼볼 챔피언: XXXVI, XXXVIII, XXXIX, XLIX, LI, LIII
AP NFL 올해의 감독: 2003, 2007, 2010
감독과 단장을 겸임하며 무려 20년 동안 지속된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왕조를 건설한 미식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자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다. 구기종목 역사에 20년에 걸친 왕조는 유일하다. 그것도 샐러리캡이라는 제한이 존재하여 팀의 전력을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 북미 프로스포츠에서 말이다.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딱히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는데, 이후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와 뉴욕 제츠에서 수석 코치와 수비 코디네이터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뉴욕 제츠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는데, 취임 기자회견에서 사퇴를 발표하는 기행을 벌이고 곧바로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의 감독 겸 단장으로 부임했다. 제츠에 부임하긴 했으나 제츠보다 더 많은 권한을 보장해준 패트리어츠로 팀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전설 그 자체가 된다. 드래프트 6라운드에서 주워온 무명의 선수를 GOAT로 성장시키는데 그가 바로 톰 브래디. 벨리칙은 본인의 전문 분야인 수비 전술에서 능력을 입증하며 패트리어츠의 수비를 리그 최정상급으로 강화함과 동시에, 브래디를 NFL 최정상급 쿼터백으로 육성하며 공격까지 순식간에 강화했다. 그렇게 3번의 슈퍼볼 우승을 이뤄내며 패츠 왕조의 시대를 열었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기존의 강력했던 수비진이 하락세를 탔으나 공격에서 랜디 모스, 웨스 웰커로 대표되는 강력한 와일드 리시버진을 구축하여 브래디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뽑아먹으며 정규 시즌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특히 2007시즌에는 정규 시즌 전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정규 시즌 성적에도 불구하고 슈퍼볼 우승에는 번번히 실패하는 아쉬운 시기를 보냈다.
2010년대에는 타이트엔드 포지션을 재정의한 롭 그롱카우스키, 브래디의 영혼의 파트너 줄리안 에들먼 등으로 일종의 리시버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베테랑이 되며 클러치 능력을 더욱 갈고닦은 브래디의 슈퍼 캐리로 3번의 슈퍼볼 우승을 더 추가했다. 이로써 장장 20년에 걸쳐 무려 6번의 슈퍼볼 우승을 달성한 역대 최고의 왕조가 완성되었다.
벨리칙의 성공의 비결은 뭘까? 앞서 언급한 수많은 선수들을 발굴해낸 것도 단장으로서 그의 업적이지만, 감독으로서의 전술적 역량도 무시할 수 없다.
먼저 수비적으로는, 라인배커에게 더 많은 유연성을 부여할 수 있는 3-4 디펜스 기반의 페어뱅크스-불로프 디펜스 시스템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공격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짧고 수평적인 패스를 통해 필드를 넓게 사용하고 공격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 철학을 가졌다. 따라서 짧은 패스를 통한 연속적인 전진을 선호하는 브래디와 리시브에 능한 타이트엔드 그롱카우스키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브래디의 신속정확한 판단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극도로 쿼터백 친화적인 플레이콜 체계인 에어하르트-퍼킨스 오펜스 시스템을 팀에 녹여냈고 브래디의 노 허들 플레이로 많은 재미를 보기도 했다.
비록 브래디가 떠난 이후 팀은 사이클이 끝나서 급격한 하락세를 타며 왕조의 본체는 브래디라는 주장이 정설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벨리칙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그 브래디를 발굴하고, 육성한 인물이 누구인가? 또한 브래디가 벨리칙의 시스템 밖에서도 맹활약할 수 있을만큼 뛰어난 재능인 것이지, 벨리칙의 시스템이 무의미했던건 아니었다. 브래디의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기량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낸 것이 바로 벨리칙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벨리칙은 브래디의 시즌아웃, 스파이게이트, 디플레이트게이트 등의 여러 번의 위기에서도 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바가 있다. 벨리칙 역시 브래디의 공백을 본인의 능력으로 최소화한 사례가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벨리칙과 브래디는 각각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감독과 선수로서 역사상 최고의 왕조의 주역이 되었으며 단지 서로가 없는 상황에서도 충분히 잘 해낼만큼 능력이 뛰어날 뿐이었다고 봐야 한다. 브래디가 GOAT인 것처럼, 벨리칙도 GOA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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